[국민일보 2010-06-22 20:59]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에 참석해 간증을 했다. 부시는 미국의 남북통일, 동서독 통일, 폴란드의 독재체제 종식 등의 역사적 사례를 들며 “기도의 힘을 믿는다”고 역설했다. 부시는 간증에 앞서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25분간 이어진 간증에서 부시는 10여 차례 박수와 환호를 받기도 했다. 다음은 부시 전 대통령의 간증문 전문.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에 참석해 간증을 했다. 부시는 미국의 남북통일, 동서독 통일, 폴란드의 독재체제 종식 등의 역사적 사례를 들며 “기도의 힘을 믿는다”고 역설했다. 부시는 간증에 앞서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25분간 이어진 간증에서 부시는 10여 차례 박수와 환호를 받기도 했다. 다음은 부시 전 대통령의 간증문 전문.
이 특별한 집회를 위해 서울을 다시 방문하게 돼 영광입니다. 저를 따뜻하게 환대해준 이명박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께 감사드립니다. 영감 있는 세계적인 설교가이자 사랑과 성령 충만한 저의 절친한 친구 김장환 목사님의 과분한 소개에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주 내내 미국과 한국에서는 60년 전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들과 참전용사들을 기리며 양국간의 동맹을 견고히 다지는 행사가 열릴 것 입니다. 이번 주간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국과 미국에서는 하나님께 합심해서 기도를 올릴 것입니다.
1950년 미국은 2차대전 승리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한국은 38선으로 인해 남과 북이 인위적으로 나눠졌고 사람들은 혈육간 생이별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자유선거가 실시됐지만 소련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에 선거를 허용하지 않았고 급기야 그 해 6월 25일, 정당한 사유 없이 북한 인민군은 남침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전보로 이 충격적인 남침 소식을 접했습니다. 미국 사람은 아무도 다시 전쟁을 치를 것을 예측 못했고 일부 시민들은 남의 나라를 위하여 참전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이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이자 미국이 한국민에게 약속한 동맹의 결의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주일 뒤 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국군과 함께 북한에 대항했습니다. 곧이어 캐나다, 영국, 터키와 호주에 이르기까지 UN 20개국은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파병을 결의하였습니다.
한국전 초기 연합군은 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북한군에 뒤졌습니다. 엄청난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위대한 백선엽 장군은 부하들에게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나라를 잃는다. 끝까지 낙동강을 사수하라”고 외쳤습니다.
국군과 미군의 결연한 의지로 낙동강 전투에서 북측의 공세를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훗날 미국은 이례적으로 외국 장교인 백선엽 장군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백 장군은 훗날 증언하기를 “미군과 국군은 몸만 함께 싸운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합쳐 함께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박수)
양국간의 혈맹 관계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용감한 인천 상륙, 중공군 참전 후 벌어진 혈투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전쟁 중 우리는 국군과 미군의 용맹과 희생에 대한 감동적인 예를 보았습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 당시 한국 군인이 적군을 향한 공습 지휘를 돕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분홍색 조끼를 입은 채 전쟁터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미 해병대원이 후에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 미군 대령은 포위를 당하자 중공군의 방어벽을 뚫기 위해 앞장서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쏘며 다른 손으론 수류탄을 던지면서 적진 30야드까지 진격하다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대령의 용맹을 목격한 부하들은 그를 뒤따라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대령은 그들이 적진 공격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페이스란 이름의 이 대령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사후 명예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민간인들의 참여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고국을 떠나온 미군들에게 먹을 것과 의복을 제공한 한국인 여성들과 아이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한국 여성은 자신이 생전에 처음 본 영어 단어는 원조물품에 적힌 ‘USA’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여인은 나중에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왔고 아들과 사위는 모두 미국 군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박수)
1953년 7월 정전될 때까지 5만4000명이 넘는 미국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천 명도 더 되는 미군들이 실종 혹은 부상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또한 300만 명의 한국인들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혹자는 이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코 이 전쟁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전 세계도 이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희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동북아시아 내 공산세력의 팽창은 멈췄습니다. 한국 내 민주주의는 살아 있습니다. 그때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의 자유국가가 아니었을 것이며 한국민은 자유도 없는 공산체제에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박수)
전쟁을 통해 미국과 한국 간에는 견고한 혈맹의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전쟁 이후 미국의 지속적인 후원을 통해 미국이 한국의 철저한 동맹국임을 입증됐습니다.
양국을 왕래하는 관광객과 기업인, 유학생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경제관계도 견고합니다. 양국 정상은 이미 한미 FTA 협정에 동의하였습니다. 양국 의회는 반드시 FTA를 승인해야 합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이 테러 공격을 당했을 때 한국은 제일 먼저 미국 편에 선 나라였습니다. 미국인들은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한국 어린이들이 무릎 꿇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던 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60년 전 미국이 한국 위해 그랬던 것처럼 신생민주국가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한국이 용맹스러운 자이툰 부대를 파병한 것을 미국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전쟁 희생의 열매는 우리 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한국민이 일구어온 번영하는 민주주의입니다. 한 참전 미군은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가리켜 “벽돌과 잿더미 속에 빈 건물들이 해골처럼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미군이 지금 서울의 모습을 본다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서울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들이 상주해 있는 고층빌딩과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멋진 경기장이 있습니다.
한국의 변신은 자유와 신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국은 근면함과 시장개방을 통하여 1950년 900달러도 안되었던 1인당 GDP를 현재의 2만8000달러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국가가 이제 아시아 4대 경제 대국, 세계10대 수출대국, G20 회원국이 되었고 올 가을에는 G20 정상회의 개최하는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진정한 성공은 기술과 경제력의 향상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참전 용사는 남한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고 자신이 왜 참전을 해야 했는지를 이해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희망찬 사회를 건설한 것이야말로 목숨을 아까지 않았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희생의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 전쟁의 한 가지 목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총성이 멎은 지 57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게 무장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이 있습니다. 한국이 번영을 누리는 동안 북한 주민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공산주의 및 고립주의 모델은 극심한 빈곤, 집단 기아, 잔혹한 탄압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북한의 얼마 안 되는 자원을 개인적 사치품과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낭비하는 지도자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이러한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저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이 포함된 6자 회담을 결성했습니다.
저는 6자 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님이 보여주신 리더십을 높이 평가합니다. 모든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의 도발에 대처함에 있어서 강한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동맹국을 수호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경계선 너머에서 고통을 당하는 북한 주민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 대통령 임기 중 가장 감동적인 만남 중에 탈북자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건 용기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민주국가는 호주와 뉴질랜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과 함께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몽골, 필리핀, 싱가포르 등 민주국가들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오는 속도는 다르지만 역사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자유는 간구하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 주시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기도로 전쟁을 이끌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할 때 전쟁이라는 대재앙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면서도 의롭다’고 말해야 한다.” 다음해 전쟁은 끝났고 노예제도라는 악은 사라졌습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공산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줄을 서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10년 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몰락했습니다. 동독과 서독은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때 동독 사람들 수십만 명은 일주일에 한번씩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벽을 부수고 나라를 통일할 힘을 얻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매섭게 춥던 어느 날 밤, 한 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 미군은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날 밤 많은 기도를 했다. 한국에 와서 두려움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곳에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나는 한국에 9개월 동안 있었고 하나님은 그 기간동안 나와 함께 계셨다.”
6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은 한국을 지키시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은 다 몰라도 정의와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분명히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이 완전히 치유되고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통일이 완성되는 그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이 속히 오게 하시기를, 그리고 한국과 미국 국민을 항상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홍해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