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년 김장환

“가난한 농부의 아들, 미국에 건너가 목사가 되다”

1934년 7월25일 경기도 화성군 안용면 장지리 버드네의 작은 농가에서 김장환은 태어났다. 가난한 소작농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일제 말기,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매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났다. 부잣집 아이들을 볼 때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던 소년 김장환-그의 장래희망은 정치가가 되어 가난을 면하고 다른 사람들도 잘 살게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환은 미처 피난도 가지 못한 채 가족과 함께 수원에서 고스란히 전쟁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군의 눈에 띄어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로 들어가게 되고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빌리 김-김장환 목사를 있게 한 운명적인 순간이 되었다. 부대에서 알게 된 미군 칼 파워즈 상사의 호의와 적극적인 주선에 힘입어 1951년 11월 12일, 17살의 장환은 두려움 반기대 반으로 미국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장환은 대학과 대학원까지 있는 밥 존스 재단의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밥 존스는 극보수라고 불릴 정도로 엄격하고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유서 깊은 기독교 학교였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그는 예수를 영접하면서부터 학업과 교내활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칼 워즈씨가 살던 버지니아주 단테시의 지역신문 ≪디키니언스≫紙에실리는 등 유명인사가 되었다. 미국 땅에 도착할 무렵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그가 겨우 2년 만에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웅변대회의 우승자가 되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것이다.

전쟁국가 한국에서 온 소년, 장환-빌리는 고교 졸업 때 우등상을 타고 밥 존스 신학대학까지 진학하여 올 A의 성적을 기록했다. 게다가 그는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밥 존스의 규율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아 8년간의 학교생활 동안 단 1점의 벌점도 받지 않는 놀라운 생활태도를 보였다. 고교시절부터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전도를 나갔던 빌리는 대학 1학년때부터는 매 주일 전도집회에 나섰다. 외딴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에 힘쓰는 그를 부르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났고 이 놀라운 동양의 신학생은 뛰어난 설득력, 조리 있고 감동적인 간증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958년 8월, 빌리는 밥 존스 시절 만나 교제해온 동문후배 트루디와 결혼을 한다.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늘 빌리를 감싸주는 트루디와의 만남이야말로 빌리를 위해 주님이 배려한 최상의 은혜라 할수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두 사람은 직장을 갖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틈만 나면 전도집회를 다녔다. 1년 안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빌리는 1959년 2월 단테침례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그 해 11월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8년 전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떠났던 17세 소년은 지식과 열정, 신앙심을 가슴에 담고 어여쁜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는 감격을 맞게 된다.

2. 사역의 나날

“수원에서 시작된 복음은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감싸고”

김장환 목사의 수원사랑은 매우 각별하다. 그는 귀국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고향이기도 한 수원을 지키며 살아 오고 있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 소읍에 불과했던 수원은 그가 돌아온 1959년 12월말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가용이라고는 단 2대 뿐이였던 가난한 도시에서 김장환 목사는 지금의 수원중앙침례교회를 키워냈다. 큰 교회를 만들려면 서울에서 개척하라는 권유가 많았지만 한 번도 수원을 떠나지 않았던 김장환 목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 “내 가족들과 내 고향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1959년 말 한국에 돌아온 김장환 목사는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토속 신앙을 믿고 있었던 가족들부터 시작하여 이웃으로 차례차례 복음을 전했다. 귀국 당시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기독봉사회 소속 선교사 김장환 목사는 허허벌판이었던 인계동에 집을 지어 이후 30년간 전도를 위한 거점으로 삼았는데 그의 집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개방된 작은 교회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학생들과 선교사 가족들, 미군들까지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수많은 사회 유명 인사들이 다녀갔다. 그의 초창기 사역에 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국인 아내 트루디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와봉사, 늘 겸손하고 부지런한 김목사의 열정적인 목회 활동이 인상적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수원중앙침례교회가 지금은 1만 5천명의 신도가 있는 대형교회로 성장했지만 1959년 말 당시에는 단 12명의 교인이 전부였다. 다 낡아 비가 새는 교회를 다시 짓고 성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증축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수많은 성도들의 봉사와 헌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작은 지방의 한 교회가 이 정도로 놀라운발전을 이룩한 데에는 김장환 목사 특유의 부지런함과 탁월한 설교 능력, 전도의 열정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청소년 선교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수원 YFC를 창설하고 한국 YFC 총재를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YFC(Youth For Christ)는 십대 청소년 선교를 목표로 하는 세계적인 조직으로 1966년 한국 YFC가 결성되고 김장환 목사가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음악, 스포츠, 세미나, 드라마 등의 간접 선교프로그램으로 수원의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집회 규모가 커지게 되자 그는 미국을 돌며 대대적인 모금 집회를 펼쳐 그 때 모금 한 20만달러로 부지를 매입하고 기독회관을 건축한다. 회관이 완공된 후
김장환 목사는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직업소년학교를 선두로 성경공부반, 중앙유치원, 수원기독야간중학교, 한국평신도신학교 등을 열었으며 수도 침례신학대학을 설립해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다.

3. 국경없는 선교

“한국이 길러낸 세계적인 종교지도자의 한 사람, 빌리 킴”

침례교 역사 이래 미국이나 유럽지역 목사들에게만 주어졌던 총회장 자리가 최초로 유색인종에게 허용되는 순간-전세계 침례교 신도들은 이 새로운 개척자, 김장환 목사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BWA 총회장 당선선소식이 전해지자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평화와 침례교를 통한 기독교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내용의 축전을 띄웠고 김목사와 오랜 친분을 유지해왔던 지미 카터 미국 전대통령도 축전을 보내왔다. 김장환 목사가 세계 침례교연맹(BWA)의 총회장으로 선출된 데에는 국경을 가리지 않고 펼쳐온 그의 해외사역들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들도 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데다 국내선교를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던 김장환 목사는 목회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해외집회를 자주 가졌다. 1960년대 초반부터 사역의 중요부분을 차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것이 김목사는 “영어설교를 훨씬 잘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대형집회에서 초청 1순위로 분류되는 목사로 꼽히며 2002년 말까지 이미 모든 해외집회 스케줄이 꽉 차있다. 지금도 그의 집무실로 세계 각국 기독교 단체에서 초청장이 쇄도하고 있고 세계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빌리 김’의 이름이 브랜드화 된지 오래이다.

YFC 초청집회와 미국교회 초청집회로 시작된 그의 해외사역은 70년대 들어 미국 뿐 아니라 스리랑카, 일본 등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집회기간마다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여들었으며 외국의 목사와 선교사들은 “너무나 감동적인” 집회라고 입을 모았다. 이러한 김목사의 해외사역은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전도집회에서 통역을 받은 일로 일순간 유명인으로 떠오르는 절정을 맞는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한국기독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로 기록된다. 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한국 개신교발전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5일간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으며 마지막날 모인 110만명의 인파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세계 최고 기록이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GEA)가 한국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를 “설교자와 통역이 가장 잘 일치된 대표적인 집회”라고 할 만큼 김장환 목사의 통역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수많은 언론과 매체가 연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집회를 특필했으며 “100만 군중, 유능한 통역”이라는 헤드라인으로 김장환 목사에게 관심을 쏟았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통역이후 김장환 목사는 일약 스타 강사의 자리에 올라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호주 , 러시아, 일본, 타이완,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 등 수많은 나라에서 그를 초청했다. 또한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개최한 제 4회 세계 순회전도자대회인 암스테르담 집회에서 대회 주강사로 설교를 담당했으며 200년 암스테르담 집회에서도 주강사로 초청되었다.

극동방송과 아세아방송을 통해 북방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김장환 목사는 러시아 지역 선교에 앞장섰다. 1991년 8월 국제 십대선교회(YFC)주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청소년 전도집회에 참여하여 순회설교를 했다. 공산권에서 일으킨 역사적인 부흥회였으며 대회기간동안 3천명이 결신 하는 성과를 거둔다. 수십년에 걸쳐 실시해온 러시아선교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기독교 정신복음 회복운동이 일고 있는데 미국을 새롭게 일으킨 대표적인 대회로 Promise keepers(약속의 일꾼들)가 있다. 김장환 목사는 1995년 로스엔젤레스 대회, 96년 아틀란타 대회, 97년 하와이와 시카고 대회의 주 강사로 초청받아 수많은 신도들 앞에 약속의 말씀을 전했다. 극동방송과 아세아방송 사장까지 겸임하고 있는 김장환 목사가 바쁜 일정을 쪼개 나가는 해외성회는 언제나 강행군이다. 빡빡한 일정, 고된 행군의 연속이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한 그의 해외선교는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