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21-10-05]
태어날 2세·딸 걱정에 반대하던 어머니
“빌리만한 신랑감을 찾기는 어려울 것”
밥 존스 대학 총장의 강력 추천에 승낙
빌리(김장환 목사)와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일주일 만인 1958년 8월 8일 저녁 8시, 미시간주 그린빌 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식 당일 한국에서는 아무도 오지 못했다. 칼 파워스 상사가 빌리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시댁 식구 누구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한 셈이다. 빌리는 나와 결혼을 결심한 뒤 한국에 ‘미국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편지를 써서 결혼을 알렸다. 개인 전화도 없고 한국에 다녀올 여건도 못되니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빌리와의 결혼이 마냥 호락호락했던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 같은 파워스 상사의 험난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빌리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데려올 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빌리를 공부시킨 뒤 반드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약속했기에 미국 여자인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혼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워스 상사는 광산촌이 있는 버지니아주 깊은 산골에 살고 있었다. 그는 광산촌으로 시집 오는 처녀가 없어서 결혼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여자가 가난한 한국으로 시집갈 리 없다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워스 상사의 부름에 나는 테스트를 받는지도 모르고 음식 준비와 집안 청소를 열심히 했다. 거리낌 없이 집안일 하는 나를 보고 파워스 상사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트루디 같은 여자가 있었다면 나도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파워스 상사는 빌리와의 결혼을 축하해 줬다. 하지만 더 큰 난관은 따로 있었다.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빌리를 반대하면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었기에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빌리가 제 남편감이 아니라면 이 결혼을 막아주세요.”
물론 빌리가 너무 좋긴 했지만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결혼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역시나 “가난한 한국에 시집보낼 수 없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무엇보다 결혼한 뒤 태어날 아이들 때문에 승낙하지 못했다. 혼혈아 신분으로 한국에서 살기 힘들 테고 나중에 미국에 와도 쉽게 적응할 수 없을 거라며 걱정했다. 아버지는 내가 예비 목사님과 결혼하는 걸 찬성해 두 분의 의견이 엇갈렸다.
“여기까지 와서 빌리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거의 포기할 뻔했지만 주님은 빌리와의 결혼을 예비해두고 계셨다. 어머니는 고민 끝에 밥 존스 대학교 총장을 만나 빌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총장이 “빌리 만한 신랑감을 찾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 당시만 해도 국제결혼이 큰 이슈였지만 빌리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