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21-10-06]


“한국으로 가야겠소” 빌리의 폭탄선언 후
작별과 모금 위해 밥존스 출신 교회 순회
빌리 설교에 감동 받은 사람들 헌금 약속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가 1958년 8월 8일 결혼을 기념하며 찍은 웨딩 스냅사진.

 

결혼한 뒤에도 우리 부부는 무척 바쁘게 생활했다. 남편 빌리(김장환 목사)는 주말마다 설교를 했다. 많진 않았지만 사례비로 월세와 식료품비, 대학원 학비 등을 낼 수 있었다. 남은 돈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허니문은 꿈같은 말이었다. 주변에선 “신혼을 좀 더 즐기라”고 말했지만 나는 불만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빌리가 늘 다정다감하게 대해줘 행복했기 때문이다.

주의 일을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는 사모의 행복을 그때부터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빌리의 이름이 알려지며 설교를 요청하는 교회들도 많았다. 빌리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공부하려고 했지만 한국 가족들의 전도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듯 어느 날 내게 선포했다.

“한국으로 가야겠소.”

빌리의 소망은 하루빨리 늙은 어머니를 전도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폭탄선언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빌리였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모든 게 편리한 미국에 살면서도 그는 틈틈이 한국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내 동의를 구하고 결심을 굳힌 빌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우리는 1959년 11월 한국으로 떠나는 배표를 샀다. 당시 남편은 내 수입까지 관리했는데 행여 내가 돈을 다 써버리면 한국으로 돌아갈 배표를 사지 못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작별 인사를 겸함 모금 여행을 떠났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출발해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버지니아, 오하이오, 미시간,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등을 돌면서 모금했다. 남편과 나는 늘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매달 50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단체가 있다면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인 캔톤 침례교회에서 그 응답을 받았다. 교회 측에서 매달 50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매달 50달러 지원은 50여년 전 교회 입장에서는 매우 큰 결정이었다. 빌리는 이후 밥 존스 학교 출신의 교회들을 돌면서 여러 번 설교했다.

“저는 가난한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 미군을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됐습니다. 피땀 흘린 노력 끝에 밥 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주님을 모르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반드시 복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선교 헌금을 작정해 주십시오.”

빌리의 말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선교 헌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를 반겨줘 빌리와 나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부족한 우리 부부를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빌리 모르게 속으로 한 가지 기도를 덧붙였다.

‘저는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빌리와 함께 한국에 가서 제가 할 일을 알려주시고 낯선 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그 당시 내게 한국은 아프리카처럼 먼 이름이었지만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