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12-24 06:50]


[성탄인터뷰]

1959년 12월 12일 밤이었다. 미국에서 출발한 화물선은 18일 만에 부산항에 닿았다. 스물한 살의 트루디는 한국 땅이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 부산의 밤 풍경이 들어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산에 있는 마을의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둠과 불빛들, 부산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출항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야경과 똑 닮았었다. 굉장한 도시구나 싶었다.”

이튿날 아침, 트루디 여사는 눈을 떴다. 갑판으로 나왔을 때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간밤의 불빛들은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판잣집에서 토해낸 가난의 자국들이었다. 미국에서 대학 졸업 후 1주일 만에 결혼한 김장환 목사의 손을 잡고 찾은 남편의 조국은 정말이지 가난했다.

1960년 2월, 한국에 온 지 두 달만에 트루디(왼쪽에서 두번째) 여사가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요한 목사]

김장환 목사는 한국전쟁 때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했다.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다. 남달리 영리하고 부지런한 그를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칼 파워스 상사가 눈여겨보았다. 탄광촌 출신인 파워스 상사는 학비가 없어 대학 진학을 접고 군에 입대한 처지였다. 결국 ‘하우스보이 김장환’은 파워스 상사가 마련해 준 408달러짜리 배표를 들고 1951년 11월12일 미국행 배를 탔다. 미국에서 부산으로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배였다. 이후에도 파워스 상사는 8년간 학비를 대며 ‘하우스 보이 김장환’을 명문사립 밥 존스 고교와 대학, 대학원까지 보냈다. 트루디는 밥 존스 고교에 다닐 때 ‘코리언 김장환’을 처음 만났다.

트루디 여사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지 올해로 꼬박 60년이다. 10일 서울 남대문에서 트루디 김(80) 여사를 만났다. 그는 목회자의 아내이기 전에 먼저 ‘선교사 트루디’의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 예순 번째 맞는 성탄절을 앞두고 그에게 ‘한국 땅에서 60년’을 물었다.

트루디 여사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밀가루로 과자를 만들어서 시어머니께 드렸다. 그럼 시어머니는 ‘미국 사람들은 밀가루로 별 걸 다 만들어 먹는다’며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사진 : 중앙일보 임현동 기자

Q : 전쟁 직후의 가난한 한국, 두렵지 않았나. 

A : “그때 뱃삯이 없어서 화물선을 타고 왔다. 태평양 파도 위에서 남편에게 ‘가ㆍ나ㆍ다ㆍ라’를 배웠다. 시어머니를 만나면 한국어로 인사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유달리 모험심이 강하다. 한국은 두려움의 나라가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부산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갔다. 시댁은 수원이었다. 초가집이었다. 시어머니가 처음 국수를 건넸을 때 그는 포크를 찾았다. 스파게티라고 여겼다. 국수 육수 위에 둥둥 떠다니는 멸치를 보고는 기겁했다. “살아있는 생선처럼 보였다.” 그렇게 1년간 시집살이를 했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미국에서 16세 때 운전면허를 땄던 그에게 한국의 가난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Q : 지금껏 남편에게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다고 들었다.

A : “한국 사람의 정(情)에 끌렸다. 그들은 따뜻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스물두 살 때 수원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아주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학생들은 나를 ‘뺑코’라고 놀렸다. 그렇게 2년을 다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김장환 목사와 큰 아들(김요셉), 딸(애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트루디 여사. [사진 김요한 목사]

트루디의 좌우명은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우라’다. 그에게 한국행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렇게 심겨진 곳에서 자신의 꽃을 피우고자 했다. 하루는 수원교도소 교도관이 자신을 찾아왔다. 교도소에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여성 재소자들이 있다고 했다. 트루디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전공도 교육학이었다. 그는 재소자들에게 영어와 함께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9년간 교도소 문턱을 드나들었다.

Q : 교도소에서 어떻게 사람들 마음을 얻었나.

A :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영어를 가르치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파이를 굽든, 화장실 청소를 하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럼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연다. 덩달아 인복(人福)도 생긴다.”

실제 그랬다. 김장환 목사가 1966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트루디 여사는 늘 구석진 주방에서 조용히 파이를 구웠다. 화장실 청소는 빠짐없이 그의 몫이었다. 점잖은 양장 차림의 목사 사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몸빼 바지에 호미를 들고서 땀 흘리는 선교사에 훨씬 더 가까웠다.

2000년 초등학생들을 위해 파이를 만들며 웃고 있는 트루디 여사. [사진 김요한 목사]

침실 청소는 1주일에 한두 번 하더라도, 화장실과 주방은 매일 청소했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다른 곳은 다 깨끗하니까.” 종종 ‘외국인 파출부’로 오해도 받았다. “어디서 저렇게 부지런한 파출부를 구했느냐?”고 물어오던 이들도 화장실 닦던 사람이 ‘목사님 사모’라는 답을 들으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트루디 여사는 1978년 교회 부설로 중앙기독유치원을 세웠다. 그곳에서 장애아동 통합교육을 실시했다. “그때 한국에는 장애아동이 다닐 유치원이 거의 없었다. 안타까웠다. 장애아동도 하나님의 자녀다. 함께 생활하면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배우게 마련이다.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익히게 된다. 통합교육을 해보니 실제 그랬다.”

트루디 여사는 “60년 전에는 한국이 이렇게 발전할 줄 몰랐다. 그래도 믿음은 있었다. 한국 사람은 정말 부지런하다”고 말했다. 사진: 중앙일보 임현동 기자

트루디 여사는 유치원 원장을 맡아오다가 지난해 은퇴했다. 자신의 월급통장을 40년간 줄곧 직원에게 맡겼다. 유치원에 돈 쓸 일이 생기면 그 통장에서 꺼내 썼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월급을 쓴 적이 없었다. “유치원에는 늘 돈이 부족했다. 내 몫만 덜렁 챙길 수는 없었다.” 생활비는 김장환 목사에게서 받는 월 60만원이 전부였다. 그것도 최근에서야 100만원으로 올랐다. 절약은 몸에 배었다. 여태껏 휴대폰도, 신용카드도 없다. “솔직히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Q : 쉽지 않은 일이다. 가슴에 새기고 사는 성경 구절이 있나.

A : “갈라디아서 2장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힘으로 사는 것이라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식기 세척기’가 생기는 거다.”

Q : 왜 식기 세척기인가.

A : “접시를 내가 하나하나 닦으면 굉장히 힘들다. 식기 세척기에 맡기면 훨씬 더 수월하다. 접시도 더 깨끗이 닦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게 마음을 씻어주는 ‘식기 세척기’다.”

2014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내 카페에서 밀대로 파이의 밑부분을 반죽하고 있는 트루디 여사. [사진 김요한 목사]

Q : 내 손으로 닦는 것과 식기 세척기로 닦는 것. 둘은 무엇이 다른가.

A : “그건 확연히 다르다. 식기 세척기에서는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온도의 물이 나온다. 그래서 속까지 씻긴다.”

Q : 언제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가슴에 처음 담았나.

A : “미국 미시간주에서 살던 중2 때였다. 집회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와서 설교를 했다. 교회는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제 가슴을 때린 구절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였다.”

남편 김장환 목사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통역했다. ‘설교 못지않게 역동적인, 역사적인 통역’이었다. 세 사람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2011년 중앙기독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트루디 여사가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서 있다. [사진 김요한 목사]

Q : 2006년에는 골수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어떻게 극복했나.

A : “가을이었다. 강연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갔었다.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그냥 참았다. 의사는 내게 ‘다발성 골수종 3기’라고 했다. 그때 저는 주님과 대화했다. ‘주님…, 암이라네요.’ 의사는 ‘왜 그리 미련하게 참았느냐’고 나무랐다.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척추의 일부를 절단했다.”

Q : 힘들지 않았나.

A : “처음에는 걷지도 못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계단 오르는 법, 자동차 타는 법부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이다. 그때 기도를 했다. 한 번은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너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나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겠느냐. 이토록 작은 일에 감사할 마음이 들었겠느냐. 네가 지금보다 온유할 수 있었겠느냐.’ 수술과 회복 과정은 제가 주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귀한 시간이었다.”

트루디 여사의 곁에 있던 둘째 아들 김요한 목사는 “우리나라는 주입식 교육인데 어머니는 달랐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주고, 시험을 잘못 봐도 혼내기보다 기다려 주셨다”고 말했다. 사진: 중앙일보 임현동 기자

트루디 여사는 요즘도 이렇게 기도한다.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가난의 땅 한국에서 60년간 피워올린 트루디 여사의 꽃들이 곳곳에 피어 있다. 그 꽃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심겨진 곳에서 당신은 꽃을 피우고 있는가?”

/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