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21-10-14]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통역 맡은 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기진맥진한 남편
“주인공은 나 아닌 빌리 목사”라며 겸손
남편은 언론에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송사 사장이기 때문에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데 익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미국과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건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고부터였다.
그전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설교를 하고 YFC 국제회의도 참석했지만 빌리 목사의 여의도 전도대회 광경이 미국 전역과 국내에 TV로 방영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많이 받았다.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을 지경이야.”
거절을 잘 못하는 남편은 인터뷰하느라 매일 기진맥진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이 내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잠깐 몸을 피해 있는 게 어떨까요.”
나와 남편은 궁리 끝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공군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신 공군 병원 박경화 원장과 남편은 1962년 수원 비행장 기지 병원에서 근무할 때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입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군 병원에 입원한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대회는 빌리 목사가 인도한 대회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내가 아닌 빌리 목사요. 유명세라는 건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허망한 건데 인기를 얻고 유지하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그런데 소망을 두지 않아요.”
나는 남편이 유명세 속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후 남편이 인터뷰를 피해 피신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 역시 “참 겸손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요청을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편에게도 “처리할 일은 빨리 처리하고 거절할 일은 냉정하게 거절하세요”라고 조언한다. 남편이 피신해있는 동안 가족들도 편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갔다. 기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기독회관으로 전화가 걸려와 한동안 불통이 된 적도 있다.
때론 남편이 바쁜 와중에 다른 사람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는 일만 덜하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편은 대게 청이 많아지면 일단 몸을 피하고 보는데 간혹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도무지 안되는 일이라면 남편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일부 사람들은 남편을 의지하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일도 다반사다. 나는 요즘도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하고 온 남편이 옆에서 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주님 분주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내도록 도와주세요.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이끌어주세요.”
‘내가 한국에서 너를 들어서 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성령님의 음성은 결코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나 또한 남편과 함께 한국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