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08-12-09 15:46]

120년 근·현대사 주인공… 고비마다 희망 선물

한국에서 기독교는 무엇일까?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 그 답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과거 한국 기독교는 앞길이 잘 보이지 않던 혼란의 시기에 새로운 길을 열고,제시하고, 앞서가는 역할을 했다. 근대문명의 전달 매개자로서, 보이지 않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전파자로서, 근대적 시민계층의 배태자로서, 우리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로서, 억압과 굴종의 역사를 신앙으로 이겨내며 민족의 소망을 잃지않도록 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해방 후에는 고난의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나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 억압에 대한 항거와 변화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일제 강점기에 기독교인들은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목사와 장로였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였는지를 능히 짐작케 해준다. 또 3·1 운동 초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지역과 교회가 있었던 지역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전국 단위를 가진,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전해졌던 유일한 조직체로서 독립만세운동의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독립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같은 이들을 특히 기억할 수 있다.

미 국무성 1947년도 군정비록(軍政秘錄)에는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빠른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워싱턴에 압력을 가한 당시의 유일한 지도자였다”고 되어 있다.

1930년대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엄청난 폭압과 폭력을 자행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억압에 일절 굴복하지 않던 많은 기독교인이 있었다.

“내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1944년 4월22일, 순교의 숨을 거두며 주기철 목사가 한 마지막 기도였다. 일제는 이를 국체(國體)에 대한 항거 곧 반란죄로 몰아 정죄했다. 한편 고통 속에서 결코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노래하며 믿음으로 미래를 예비한 분들이 있다. 윤동주는 ‘십자가’란 시에서 변함없는 소망과 드높은 희생정신을, 김교신은 ‘조와(弔蛙)’에서 변함없는 희망을 밝혀주었다. 김교신은 우리 반도가 심약한 지정학적 험지가 아니라 대륙과 대양을 잇는 무한한 발전의 곬으로 빛나 보이게 했다.

◇ 복음전파에 바친 일생=”부흥운동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과를 나타낸 부흥사는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였다.” 당시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목회자에 대한 김양선의 평가다. 김익두 목사는 1920년대 서민층에 도달하는 독특한 메시지를 신유(神癒)에서 발휘했고, 천년왕국의 종말론으로 현실 체제에 부정적인 내세의 질서를 희망하게 했다. 그의 집회는 일반 신문에서도 보도될 만큼 파급력과 영향력이 있었으며 1만명 이상 모인 대형집회의 시초가 됐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이명직, 한경직, 김재준, 강신명… 더 많은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한정 때문이다.

성결교단 최초의 신학자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전도라고 했다. 한경직 목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특히 해방 후 6·25를 거치면서 대규모 구국기도회를 열고 나라의 통일을 위해 기원하며 매일 오후에는 가두로 나서 대중전도와 개인전도를 했다. 백낙준 박사는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사명감에 넘친 참된 목회자로서 영원히 본받을 이 나라의 목회자상’이라 했다. 김명혁 목사는 “한경직 목사는 한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다. 자기의 허물과 함께 민족의 비극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을 줄 아는 목회자였다. 한편 김재준 목사는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사회변혁의 복음으로 바꾼 신학자다. 기독교인의 사랑과 희생, 살아있는 신앙으로 역사를 변혁시키는 사회변혁과 교회갱신을 주창한 신학자로서 민주화에도 공헌했다. 방지일 목사는 아버지 방효원 목사에 이어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고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 영혼과 물질문명의 조화= 오중복음, 삼중축복의 긍정적 믿음을 강조한 조용기 목사는 ‘세계 최대 교회’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60억 인류를 이끄는 슈퍼엘리트 가운데 종교계 인사로 꼽히기도 했다.

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조용기 목사는 성령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현실적인 생생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하게 했다. 그는 우리 역사 속에 주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기독교가 살아 숨쉬는 가슴 속의 신앙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역사적 대역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설교는 한국을 변화시켰고, 그의 성령사역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위상을 빛낸 목회자가 또 있다.

김장환 목사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침례교 세계연맹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극동방송 등을 통해 한국기독교의 세계화와 국내 기독교 선교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1980년대 한국 교계에 설교로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목회자 중 한 사람이 곽선희 목사다. 그는 ‘설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목회자로, 한국교회의 설교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가 개척한 소망교회는 한국의 대표적 교회가 됐다.

감리교의 김선도 목사도 주목할 만한 목회자이다. 그의 설교는 적극적인 신앙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편 옥한흠 목사는 은퇴 후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더욱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조직,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제자훈련사역을 통해 평신도가 예수의 작은 제자가 돼 사회를 섬기게 했다. 한국사회를 변화시킨 기독교인들이 어디 이들뿐일까? 이들은 다만 드러난 하나의 가지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히려 숨겨진 더 많은 가지들이 그들이 애쓰고 기도하며 수고한 열매를 지금도 우리 사회에 아름답게 드리우고 있다. 앨런,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 외국선교사들도 잊을 수 없는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서양 근대문명의 길을 제시, 우리나라의 면모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지가 많고, 오랜 세월 자라온 나무는 그 우람한 크기만큼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이렇게 자랑스럽고 가슴 벅차게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그만큼 부끄럽고 가슴 아프게 만든 이들도 우리 기독교 100년이 넘는 역사 가운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일들 이외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의 강물, 생수의 저류(低流)가 우리 사회를 흐르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만은 변치 못할 사실이다.

/ 대표집필 권평(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강남대 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