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02-10-27 17:22]

약속 시간에 맞춰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담임목사(극동방송사장)의 사모 트루디(Gertrude Stephens·64)여사를 찾아갔더니 그는 수원 원천동의 중앙기독초등학교 교내 제과점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혼자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유치원아로 보이는 작은 아이가 들어와서 “아줌마,빵 하나 줘요”하며 4등분으로 접은 천원짜리 하나를 내밀었다. 여사는 익숙한 한국말로 “어서 와,어떤 빵으로 줄까”하면서 친손자에게처럼 일일이 빵 고르는 것을 도와주고,아이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자 “아주 잘 골랐네”하며 500원을 거슬러 주었다.외모는 외국인이었지만 여사는 편안한 아줌마나 할머니처럼 보였지,1억6000만명의 성도를 이끌며 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침례교 세계연맹 총회장의 부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화장기 없이 허름한 막 옷을 입고 거칠어진 부엌데기의 손을 재빠르게 놀리는 그는 한 눈에도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였다. 삼남매의 간식과 손님접대를 위해 책을 보고 빵굽는 법을 익혔는데 이제 그의 파이는 전직 대통령들에게까지 알려진 ‘명품’으로 통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여기서 일해요. 체육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운동을 마치면 여기에 들르지요, 학부모와 교사가 같이 커피도 마실 수 있어요.여기는 이 학교에서 정말 재미있는 곳이에요”

대지 1만9000여 평방미터에 세워진 중앙기독초등학교는 뛰어난 시설을 갖춘 사립학교다.모든 시설은 미국의 ‘장애인 건축기준’에 맞춰 장애아들이 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한달 수업료는 11만원. 시설과 내용에 비해 저렴한 비용이다. 이 학교는 정원의 10%를 장애아로 선발,비장애아들과 통합교육을 시키고 있어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방법을 익힌다. 장애아동의 특수교육에는 수업료보다 약 세 배 가량의 되는 돈이 들기 때문에 트루디여사가 빵을 구어 버는 돈을 전액 장애아 특수교육에 충당한다. 그뿐 아니다. 트루디 여사는 60년대 말부터 유치원을 운영했고 지금도 중앙기독초등학교 유치원장으로 있지만 지금까지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봉급통장을 여직원에게 맡겨 여직원이 전액을 유치원 운영비로 사용한다.

60대 중반임에도 트루디여사는 몇 정거장 거리는 걸어다닌다. 지금도 수요일 예배는 교동의 중앙침례교회까지 1시간 거리를 걸어서 간다. 60년대 인계동 벌판에 살때는 시내버스가 없어 애기를 없고 40분간 걸어서 수원시장에 장보러 다녔다. 지금도 서울에 갈때는 도보와 지하철과 시내버스로 이동하는데, 젊은 사람들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빠르고 경쾌하다.

트루디 여사는 만 20세이던 지난 58년 미시간주 그린빌에서 24세의 청년 김장환과 결혼했다.수원에서 태어난 장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했다.그때 장환의 성실함을 눈여겨 봤던 칼 파워스 상사의 희생적인 도움으로 장환은 미국에 건너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처음에는 언어문제와 고향생각으로 많은 고생을 했지만 전국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웅변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안 장환은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칼 파워스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대회에 나가기로 결심,영어발음을 고치기 위해 입에 구슬을 물고 피나는 연습을 했다.그리고 대회에 나가 전쟁중인 나라의 가난한 하우스보이가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와 눈물로 공부하면서 경험한 민주주의를 웅변했을때,장내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감동에 사로잡혀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디는 밥 존스의 고등학생으로 학교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녀.품행이 단정하고 명랑해서 재단 총장의 아들인 밥 존스 3세(현 밥 존스 대학교 총장)까지 데이트를 신청할 정도였다.그럼에도 트루디는 영어는 서툴지만 귀엽고 ‘싹싹한’ 장환이 좋았다.두 젊은이는 트루디의 부모에게 인사를 갔다.동양청년이라고 거부당할 각오를 한 장환은 트루디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얼른 잔디깎는 기계를 건네받아 말끔하게 잔디를 깎았다. 청년이 얼마나 총명하고 청산유수인지 아버지는 청년을 만난지 30분만에 동네 목사에게 “한국에서 온 신학생의 설교를 부탁한다”고 전화를 걸 정도였다.

장환이 대학원을 마치자 두 사람은 59년 12월 배를 타고 19일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왔다.모친 박옥동 여사는 8년만에 돌아온 막내아들을 얼싸안고 울다가 서양 며느리를 안고 또 울었다.두 사람은 수원의 큰형님 댁에서 14식구와 함께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신랑이 다음날 새벽에 깨어보니 미국 새댁은 이미 부엌에 나아가 형수를 도와 불을 때고 있었다.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명문대학을 졸업한 트루디에게 60년대 초반 찢어지게 가난한 한국 농촌의 삶은 고달프기 이를데없는 것이었을테지만 그는 항상 웃는 얼굴에 무엇이든 신기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긴 겨울밤에는 시어머니에게서 화투도 배워 민화투의 ‘굳은자’라는 말도 알고 있다.수원여중 1학년에 들어가서 3년간 국어수업을 받기도 했다.

지난 89년 큰 아들 김요셉목사가 미국에서 기독교육학을 전공하고 돌아왔을때 트루디여사가 60년대 말에 시작한 중앙유치원이 12개반으로 늘어나 있었다.이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의 창의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초등학교까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았다.그래서 아들의 제안으로 기독초등학교를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김장환 목사는 선산,집,기독회관 등 모든 것을 처분하고 극동방송에서 당겨받은 퇴직금까지 톡톡 털어 총 65억원을 내놓으며 “십일조는 내야 한다”고 훈계한 다음 일체 후원해 주지 않았다.아들은 모자라는 돈에서 꼼짝없이 6억5천만원의 십일조를 내고 나머지는 자력으로 모금하고 빚을 내 학교를 건축했다.토지구입과 건축비 등 총 100억원이 들어간 중앙초등기독학교는 법인으로 등록돼 법인 이사 8명이 관리한다.김장환 목사 부자는 학교소유권도 없고 재산도 전무한 상태다. 김 목사와 단촐하게 학교 관리동에서 생활하는 투르디 여사는 김 목사로부터 매달 생활비 100만원을 받아 집세로 40만원을 내고 나머지 60만원으로 한달을 꾸려간다. 그것도 최근에 많이 올라서 100만원이지,10년 전에는 월 1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 사모의 자리는 처신이 까다롭고 여러 뒷말을 듣기 쉬운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그러나 트루디 여사는 가는 곳마다 칭찬이 자자하다.김목사가 오늘에 이르른데에는 사모의 순종과 내조의 덕이 절반을 넘는다는 평가를 듣는다. 여사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에는 남모르는 어려움도 있었던 모양이다. 큰 아들 요셉목사의 결혼을 앞두고 한국 며느리를 고집하는 김 목사와는 달리 여사는 마음 속 깊이 미국 며느리를 원했다. 생래적으로 느낌이 통하는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삶을 그리워했으리라.며느리는 모두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교포2세를 맞았다.

트루디 여사는 말한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있고,손에는 일거리를 들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 수원=임순만 부국장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