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2018-08-07 20:37]
한반도 평화에 마지막 열정 바칠 것…北에 기독교 전할 날 오길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 작은 키의 열일곱 살짜리 한국 소년이 배에서 내렸다. 소년 손에는 단돈 130달러와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가 쥐여 있을 뿐이었다. 막막함과 두려움에 떨던 이 앳된 소년은 훗날 한국 기독교 부흥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다.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84·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이야기다.
김 이사장의 인생은 있는 그대로가 한국 현대사이자 개신교 선교의 역사다.
어린 시절 미군 하우스보이로 출발해 유학 시절 신을 만났고, 1973년 110만명이 모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통역을 하면서 세계적인 목회자가 됐으며, 극동방송을 운영하면서 한국에 방송 선교의 씨앗을 뿌렸다.
지금도 변함없는 현역인 김 이사장을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 사옥에서 만났다.
― 얼마 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장례식에 다녀오셨는데.
▷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가시는 모습도 겸손하셨어요. 한국 돈으로 30만원 정도 되는 관에 누워 계셨는데 그 관은 루이지애나 교도소 재소자들이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 부부도 참석했는데 제가 세계 기독교인 대표로 추모사를 낭독했어요. 한국 교회 부흥에 한 획을 그었던 1973년 여의도 전도집회 때가 떠오르면서 눈시울이 많이 뜨거워졌습니다.
―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 방송을 통해 설교하고 여러 군데 초청 집회에도 나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일랜드CC에 근무하는 83명을 전도해 그분들께 침례교식 합동세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달 13일과 14일에 열리는 `파이팅! 나라사랑축제` 음악회, 9월 `찬양대합창제`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직접 진행하시는 토크쇼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가 700회를 맞았는데요.
▷ 유엔 사무총장, 전직 대통령, 연예인에서부터 택시기사, 청소하는 분까지 다양한 분을 만났어요. 두세 분이 함께 나온 적도 있으니 실제로 출연한 분은 700명이 넘어요.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저 역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 한국전쟁 때 하우스보이를 하면서 미국과 인연을 맺으셨죠.
▷ 그때는 중학교가 6년제였어요. 중학교 4학년 때,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 용산철도고등학교 국비장학생 시험을 보러 서울로 왔어요. 집이 가난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날이 1950년 6월 26일이에요.
기차 운행이 중단되고 다리도 끊어져 겨우 집으로 왔어요. 며칠 후 땔나무를 구하러 갔는데 수원교도소에 미군이 주둔해 있는 걸 봤어요. 그때 동네 아이들과 초콜릿을 얻어 먹으러 갔다가 하우스보이로 채용됐죠.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선뜻 응했어요.
― 열일곱 살 때 미국 유학을 가셨는데.
▷ 제가 하우스보이가 되고 나서 얼마 안돼 1·4후퇴가 일어났어요. 그때 저는 미군을 따라 경북 경산까지 갔는데 옆 텐트에 칼 파워스 상사가 있었죠. 그는 술도 담배도 안 하는 사람이어서 나와 많이 어울렸어요. 그가 어느 날 미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죠. 하지만 전쟁통에 미국으로 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절차도 복잡했고, 부모님도 설득해야 했으니까요. 파워스는 자기 근무 기간까지 연장해가면서 내 입학허가서를 받아주고 배표까지 끊어줬어요. 그분 때문에 제 인생에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2013년 돌아가셨어요.
―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신 계기는.
▷ 미국에 갔을 때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먼 길 간다고 부적 두 장을 넣고 꿰매주신 옷을 입고 배를 탔을 정도니까요. 처음 예수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어요. 미국 명문 기독교계 학교인 밥존스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국 학생은 당연히 한 명도 없었고, 주변에 한국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제게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향수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 학생이 들려준 성경 구절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어요.
―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방송 선교를 하셨는데.
▷ 처음에는 방송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방송과의 인연은 아세아방송과 처음 맺어졌어요. 당시 아세아방송은 중국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오키나와에 있었는데 1960년대 후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그곳을 떠나게 됐어요. 그때 미국인 지인이 저에게 제주도로 방송국을 옮기고 싶으니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받고 용지를 마련해 아세아방송 재단법인을 설립했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허가를 반대했는데 “공산권으로 전파를 쏘는 방송이 하나 생기는 것은 미군 1개 사단이 와 있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는 말로 설득을 했죠. 그러다 1977년 서울에 있던 극동방송과 공동운영을 시작했죠.
― 극동방송이 가진 의미는 뭔가요.
▷ 극동방송은 말 그대로 극동지역, 즉 북한은 물론 러시아·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목적으로 1956년 처음 설립된 방송사예요. 설립 이후 지금까지 다른 목적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5공화국 때 종합편성 허가를 내준다고 제의가 오기도 했죠. 저는 안 하겠다고 했어요. 오로지 복음만 전하겠다고.
극동방송은 신도분들이 낸 헌금의 도움을 많이 받고있습니다. 월 1만원씩 내는 `전파선교사` 운동이 대표적인 모금 방식입니다. 극동방송이 광고를 거의 하지 않고도 운영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신도들의 정성 때문입니다.
― 종교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기독교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우선 교회의 분열과 교계의 자리 다툼을 지양해야 합니다. 명예와 부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종교 지도자들의 자질이 높아져야 합니다.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회가 연합해서 초대교회 정신을 회복하고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들이 너무 울타리를 높게 쌓고 사회를 안 내다보는 것도 문제예요. 교회 내에서만 사랑을 나눌 게 아니라 밖으로 시선을 돌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부유해지면서 예전 가난한 시절의 절박함이 다 사라졌어요. 이미 우리 교인들의 귀는 무뎌질 대로 무뎌진 것 같아요. 이렇게 가다가는 하나님이 한번 흔들어놓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회개하면 늦죠.
■ `3포 세대` 생각하면 슬퍼…젊음 믿고 희망 잃지 않길
― 남북 화해 분위기를 어떻게 보시는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아픔을 겪은 땅에서 화해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현 정부가 그 일에 수고하고 있는 것 같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죠. 하지만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북한 인권에 대한 한미 정상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아쉬워요. 많은 이들이 신앙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가야 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공고한 한미동맹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역사에서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인내와 정성, 합리적인 판단력이 필요한 지난한 과정이 될 겁니다. 국운을 다루는 일은 신중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 희망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다면.
▷ 청년들이 3포세대니, 4포세대니 하는 말을 할 때면 가슴이 아파요. 그럴 때마다 절대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 인생을 보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태어나서 전쟁을 겪으며 컸어요. 그래도 저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미군들의 군화를 닦으면서도 최선을 다했어요. 그 모습을 누군가 눈여겨보고 저를 미국으로 보내 공부를 시켜준 거예요.
`젊음` 그 자체가 가장 큰 재산이자 희망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여러분께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 한국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연결고리 역할도 하셨죠.
▷ 역할이라기보다 트럼프 당선의 1등 공신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을 문재인 대통령께 소개했죠. 두 분의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께서 나도 미군의 배를 타고 남한으로 넘어온 피란민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하셨죠.
― 가족관계가 궁금합니다.
▷ 사랑하는 아내 트루디와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첫째 김요셉은 원천침례교회 목사로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고, 둘째 김애설은 미국 바이올라대 교수로 있습니다. 막내 김요한은 대전에서 함께하는교회 담임목사로 있습니다.
―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집회 재현 행사를 하신다면서요.
▷ 네. 2020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해서 대규모 전도대회를 열 예정입니다. 1973년 열린 대회가 한국 개신교 부흥의 전환점이 됐듯이 47년 만에 열리는 이 행사도 우리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2020 프랭클린 그레이엄 페스티벌 준비위원회`가 꾸려졌고 극동방송 사옥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영훈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대회장을 맡았습니다.
―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평양을 비롯한 북한 주요 도시에 극동방송을 세워 주님의 복음과 자유를 전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힘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전도에 열과 성을 바치고 싶습니다.
■ 김장환 이사장은… 193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열일곱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밥존스고등학교를 나와 밥존스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전도집회 통역을 맡으며 세계적인 목회자로 명성을 얻었다. 국제복음방송 이사, 아세아방송 이사장, 극동방송 사장, 국민일보 이사, 동양인 최초로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지냈다. 미국종교방송협회 명예의전당상을 수상했다.
/ 허연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