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2-23 03:02]
김장환 목사가 본 빌리 그레이엄
1973년 통역 계기로 45년 우정… 외국인 목사 대표로 추모사 예정
“그의 장례식도 전도의 場 될 듯”
“빌리 그레이엄은 겸손, 정직, 진실을 모두 갖춘 큰사람이었습니다.”
김장환(84·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는 2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자택에서 별세한 빌리 그레이엄(1918~2018) 목사의 삶을 ‘겸손’이란 단어로 정리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영적(靈的) 공황 상태였던 미국 사회에 복음의 가치를 열정적으로 환기시킨 20세기 대(大)부흥사. 1949년 개최한 LA 전도대회 중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신앙을 갖게 되면서 유명해진 그레이엄은 미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기도 했다. 정열적인 설교와 카리스마로 전 세계 185개국, 2억1500만명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열었고, ‘미국 대통령들의 멘토’로 꼽힌 거인이지만 그 힘의 원천은 겸손에서 왔다는 뜻이다.
김 목사는 1973년 100만 인파가 몰렸던 서울 여의도광장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서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레이엄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22일 만난 김 목사는 그레이엄과의 45년 우정에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들려줬다. “사람들 무례한 요청에도 항상 웃는 낯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해주었죠. 세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설교 내용을 준비하고도 현지에 와서 상황이 달라지면 바로 내용을 바꾸는 꼼꼼한 분이었습니다.” 여의도 집회를 준비하면서는 “한국에 양(羊)이 있느냐”고도 물었다. 한국 청중들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서다. 김 목사는 “그 겸손과 섬세함을 보면서 왜 그가 세계적인 목회자가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그해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 집회는 연인원 320만명, 마지막 날엔 117만명이 모였다. 참석자들로 마포대교가 미어터지던 첫날 50만명이 모인 광경을 보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조차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이라고 입을 벌렸다.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와 그에 못지않은 김 목사의 열정적인 통역은 ABC, NBC를 통해 미국에도 방송됐다. 이후 “통역하던 키 작은 목사는 누구냐”는 궁금증이 일면서 당시 39세 ‘수원 시골 교회’ 목사는 일약 스타가 됐다. 김 목사의 영어 이름 ‘빌리(Billy)’도 덩달아 화제가 됐다. 6·25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돕던 시절 미군 병사들이 지어준 이름. 공교롭게 영어 이름도 같고, 출신 학교(밥 존스 대학교)도 같은 두 ‘빌리’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적 전도대회의 주인공이 됐고, 김 목사는 이때 얻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훗날 세계침례교연맹 회장까지 지냈다. 김 목사는 “당초 그레이엄 목사 측에선 한경직 목사님께 통역을 부탁드렸다”며 “이미 70대였던 한 목사님이 사양하시면서 저를 대신 추천해주신 덕에 제가 통역을 맡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여의도 집회는 한국 개신교계에 대형 집회, 대형 교회의 시작이었다”며 “전도대회를 계기로 이후 한국 개신교는 400% 성장했다”고 말했다.
전도대회 이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김 목사는 매년 미국으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찾아 조언을 들었다. “3년 전쯤 뵀을 땐 시력, 청력이 안 좋아 저를 못 알아봤습니다. 그래도 ‘저 왔습니다’ 하니 반가워하시며 ‘우리 한국서 다시 한 번 전도대회 하자’고 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했지요.”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 장례식 참석을 위해 23일 오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으로 출발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사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보이는 장례식에서 김 목사는 외국인 목회자를 대표해 추모사를 한다. 이미 5~6년 전부터 고령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별세에 대비해 재단 측으로부터 추모사를 부탁받았다. 이 때문에 김 목사는 일정을 잡을 때 ‘그레이엄 목사 별세 후 닷새 안에는 샬럿에 도착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 김 목사는 “그의 장례식은 아마도 또 다른 전도의 장(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한수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