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4-08-14 00:00]

[조영남, 내가 만난 사람들] (12) 김장환 목사
“얼만지 알면 욕심나” 사례금 봉투째로 내게 줘 / 2002.04.29

하마터면 나는 목사가 될 뻔 했다. 그 사정은 누구보다 김장환 목사님이 잘 아신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 목사 공부를 시킨 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개신교 여러 교파 중 침례교가 단연 강세다. 김목사님은 지금 그런 세계침례교협회의 총회장이다. 어느 나라에 가도 국빈 대우다. 한마디로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분이다.

그처럼 대단한 김목사님을 처음 뵌 건 내가 용산 육군본부에서 군복무 중일 때였다. 거기 육본교회에서 목사님은 초빙선교자, 나는 성가대원으로 만났다. 김목사님은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마치고 당신의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당시 한국에선 꽤나 생소하던 침례교회의 목회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내가 성가를 곧잘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목사님은 이곳 저곳 선교 초빙을 받을 때마다 나의 상관한테 부탁해 군복 입은 나를 성가가수로 내세웠다. 미국식으로 설교와 복음성가 의 팀을 이룬 셈이었다.

목사님은 간혹 주최측으로부터 사례봉투를 받는 경우가 생기면 열어보지도 않고 나한테 건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걸 열어서 얼마나 들었나를 알게 되면 욕심이 생기니까 미스터 조가 그냥 가져.”

제대를 몇 달 앞뒀을 즈음 목사님은 지나는 말처럼 한마디 하셨다. “얼마 안 있으면 빌리 그래엄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대규모 부흥집회를 여는데, 내가 통역을 맡게 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내가 미스터 조를 특별 성가 가수로 추천해볼 거야.”

당시만 해도 대중가요 가수가 경건한 종교 집회에 공개적으로 나선다는 건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짧은 머리에 군복을 입은 채 여의도 광장의 100만 인파 앞에서 ‘주하나님 크시도다’를 부르는 행운을 잡았다. 순전히 김목사님이 밀어주신 덕분이었다.

김목사님의 영어 통역은 통역 자체만으로 실로 압권이었다. 세계 기독교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었다. 집회 도중 김목사님은 내게 또 다른 말을 전했다. “이번에 미스터조 노래를 듣고 반한 켄 앤더슨이라는 세계적인 선교영화 제작자가 당신을 미국으로 초청하겠대. 당신은 성가가수로 미국을 순회하면서 선교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거야.”

제대를 하자마자 나는 김목사님의 옷깃만 부여잡고 생전 처음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목사님은 당시 미국에서 빌리 그래엄 목사의 TV설교 통역으로 완전히 ‘톱스타’ 자리에 올라 있었다. 나는 김목사님을 따라다니며 웨스트 팜비치에서 빌리 그래엄 목사를 다시 만나 노래를 선물했고, 네덜란드에서 열린 ‘그래엄 세계기독교 지도자 대회’에서 한국 대표 성가가수로 나섰고, 캔 앤더슨 영화사에 머물며 순회성가 가수로 정착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프로 성가가수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렬한 신앙심이나 신학에 관한 최소한의 기본 상식도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 사정을 하소연하자 김목사님은 경기도 사투리로 대뜸 한마디 하셨다. “그럼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지 뭘 그려.” 당시 결혼했던 내가 입학할 신학대학교와 아내와 함께 거처할 집까지 수소문해 마련해준 사람은 물론 김목사님이셨다.

내가 방학을 틈 타 잠시 귀국했을 때였다. 나는 김목사님이 정치인이나 사업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 딴엔 충정을 표시한답시고 소위 ‘직언(直言)’을 했다. “목사님 신분에 도대체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십니까?” 목사님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어이, 사람들이 날더러 왜 하필 조영남 같은 딴따라와 어울려 다니냐고 얼마나 항의하는지 알어?” 아! 나는 그 한마디에 멍해지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김목사님은 내가 세계적인 성가가수가 될 수 있는 모든 길을 직접 열어주셨다. 하지만 나는 결국 목사나 성가가수가 되는 데 실패했다. 기독교에선 기도를 하고 탕자가 돌아오는 데도 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김목사님 앞에서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 조영남 / 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