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3-06-30 17:53]
오늘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 여의도 집회 40주년
1973년 6월3일 주일 오후 서울 여의도 광장. ‘빌리 그레이엄 목사 한국 전도대회’의 마지막 집회 시간이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그레이엄 목사가 참석자들에게 요청했다.
“이 많은 관중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작정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이날 파악된 결신자는 무려 4만 여명. 전달 30일부터 닷새 동안 치러진 대회기간 집계된 전체 결신자(8만1842명)의 반을 차지했다. 당일 집회에 참석한 ‘110만명’이라는 숫자는 한국 기독교 집회 역사에 기념비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전도 집회 개최 40주년을 맞이해 당시 집회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기독교역사박물관 상근 연구원인 최태육 목사는 2일 “당시 여의도 집회는 교파를 초월해 한국교회 전체가 동참한 순수한 복음 전도 집회였다”면서 “분열과 갈등으로 위신이 추락하고 이단 발호로 침체돼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연합정신과 복음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여의도 집회는 대규모 부흥집회의 신호탄이 됐다. 이듬해에는 한국교회의 ‘전도 폭발’을 불러온 초대형 부흥 집회인 ‘엑스플로 74’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77년에는 외국 단체가 아닌, 순수 한국교회 및 목회자들이 주관한 ‘민족복음화 성회’가 개최됐다.
한국교회 부흥의 ‘마중물’이 된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는 전례가 없던 대형 집회였던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집회 장소 선정이 난제 중의 난제였다. 당시 집회 준비위 측에서는 “여의도광장이 너무 넓어 10만명이 모여도 산만하게 보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장소 몇 곳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집회 대회장이었던 고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준비위는 성경말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여의도를 고수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라.’(수 1:3)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누가 맡느냐도 걱정거리였다. 그레이엄 목사는 해외 전도집회를 준비할 때 까다로운 통역자 선정 기준을 두고 있었다. 반드시 신학교육을 받은 자여야 할 것, 대회 주최국가 시민이어야 할 것 등이다. 처음 물망에 오른 이는 한경직 목사. 하지만 당시 71세였던 한 목사는 통역 요청을 세 차례나 고사했다. 그러면서 당시 39세였던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를 통역으로 추천했다.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효과를 극대화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 집회에 대한 정부 측 배려도 눈길을 끌었다. 국가 행사 이외에는 여의도광장을 빌려주지 않았던 정부는 사용료 없이 제공해줬고, 군악대까지 동원해 찬양곡을 연주토록 협조했다.
극동방송은 지난달 31일 그레이엄 목사의 한국 전도대회 4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지상 최대의 성령 콘서트,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를 방송하며 당시 집회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김장환 목사는 방송에서 “당시 집회는 복음의 핵심가치, 즉 ‘오직 예수’를 전하는 자리였다”면서 “‘오직 예수’만 되찾으면 한국교회 부흥의 꽃은 다시 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레이엄 목사 전도 집회의 하이라이트는 예수 영접의 시간. 빌리 그레이엄 재단이 제작한 당시 여의도 집회 동영상에는 그레이엄 목사의 영접 요청에 결신을 다짐한 수많은 남녀노소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비녀를 꽂은 백발의 할머니부터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 젊은 엄마, 제복 차림의 학생과 군인들, 지팡이 든 노인들….
뜨거운 아스팔트 자리를 털고 일어선 이들을 위한 그레이엄 목사의 마지막 당부는 이제 막 신앙을 처음 가진 결신자들을 향한 당부만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로 한 여러분은 이제 네 가지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첫째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세요. 둘째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시니까요. 셋째 어느 누구에게나 전도하세요. 넷째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십시오.”
/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