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저널21 2011-11-07 00:00]
1959년 11월,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몸을 실은 김장환은 망망대해 속에서 한 소년을 기억해 냈다. 8년 전 미군 군복을 줄여 만든 옷을 입고 어머니가 주신 고향 흙 한 줌 넣은 주머니에 기대어 있던 소년,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며 고향에서 출항한 배 위에 서 있던 17세 소년을. 그리고 기적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그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기적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Part. 1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지금도 보리밥을 싫어한다. 어렸을 적 이미 평생 먹을 보리밥을 다 먹었기 때문이다. 그가 초등학교 당시 정치가의 꿈을 키웠던 이유 중에는 쌀밥과 고깃국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고스란히 겪고 있던 김장환은 어느 날, 미군의 눈에 띄어 미군무대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되고 거기서 운명을 바꾼 칼 파워스 상사를 만났다. 그렇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틀 동안 배 멀미로 정신이 없었지만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인생을 향해 출발한 여행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쉬지 않았다.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다. 가족은 그에게 ‘초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시계의 시침이나 분침보다 먼저, 초침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는 의미다.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자리에서 만난 김장환 목사는 그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힘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이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성서의 모세처럼, 이 많은 일을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에너지와 여유가 있었다. “이거 원,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악수를 건넸다. 스스로를 광고한다는 괜한 오해와 원치 않게 시기하는 사람이 생겨 평소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았지만, 교인을 비롯해 누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든 절대 잊지 않고 친히 만나며 대답해주는 그다. “누가 전화를 하던 리턴을 해줘야지요. 그런데 제가 전화를 걸어도 답을 주지 않는 목사들이 더러 있어요. 목사가 언제부터 그렇게 높아져서……. 두 아들이 모두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들에게 늘 당부해요. 겸손해라. 그리고 걸려오는 전화에 대해서는 직접 답을 줘라. 한국에 없거나 도저히 상황이 안 되면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리턴해라. 전화 받는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화를 거는 사람이 중요하다.” 김장환 목사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격을 먼저 갖춰야한다고 말한다. “인격, 인품이 갖춰진 다음에 성직을 받아야지, 성직 먼저 받아놓으면 인격이 따라온다는 보장이 없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극동방송
1970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조찬기도회에 외국인 강사 통역으로 참석한 김장환 목사는 밥 존스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인 데이비드 윌킨슨을 만났다. 윌킨슨은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 현재 극동방송) 일본 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김장환 목사에게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송신소를 한국 제주도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오키나와가 일본 반환을 하게 되니 일본 정부가 송신소 철수를 요구해왔어요. 그러니 한국에서 할 수 없겠냐는 거죠. 북한과 중국에 방송을 송출할 수 있도록.” 김장환 목사는 언젠가 방송국 사람들과의 저녁식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국에서 남자를 여자로 바꿀 수는 있어도 방송국 설립허가는 받을 수 없다고. “저는 방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일 중요한 게 허가인데 가능한 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오랜 친구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당시 공화당 당의장으로 정치실세 중 한 명인 윤치영 박사를 만났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이건 1개 사단보다 더 중요하다’, 왜? 대북방송을 해야 하니까. 대통령께 이야기해 볼 테니 자료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자료를 만들어주었어요. 그걸 들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간 겁니다. 가서는 ‘이건 안보 차원에서 1개 사단보다 중요합니다.’ 북한에 복음이 들어가고 중국, 소련에 복음이 들어가니까요.” 그렇게 허가를 받았다. 허가는 받았으나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그 과정에 친구 윌킨슨이 사망했다. 원인은 과로였다. 그는 오랜 친구의 건강 하나 챙기지 못한 잘못이 고통이 돼 하염없이 울었다.
윌킨슨의 사망으로 김장환 목사는 졸지에 FEBC 방송국 설립 실무자가 됐다. ‘Far East’를 한자로 옮긴다면 극동이었다. “그때 팀 선교회사가 지은 방송이 국제복음주의방송인데 상호를 극동방송으로 바꾸어버렸어요. 진짜 극동방송이 못 들어오는 겁니다. 이미 상호가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세아방송’으로 명명했어요.” 극동방송은 미국 팀 선교회가 1954년 설립해 1956년 12월 23일 인천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KBS와 CBS에 이은 세 번째 방송국이었으며 민간방송국으로는 2번째였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렸어요. 결국 예산이 없어 60만불 부채를 안게 됐죠. 절 찾아와 인수해가라고 하더라고요.”
김장환 목사는 1977년 1월 1일, 한국 극동방송 제7대 국장에 취임했다. 개국 21년 만에 첫 한국인 국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극동방송을 인수할 당시 팀 선교회 측에서 해고해야 할 직원 명단을 알려왔다. 해고 예정자의 이름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무려 3줄이 그어져 있는 이름도 있었다. 그는 단 한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직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극동방송 경영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직원을 사랑하며 직원들은 그를 존경한다. “25년이 지났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으니까 장애인들이 오가기가 힘들더라고요. 다시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지금 설계중이에요. 그것까지만 마치면 저는 일선에서 물러나야죠.” 김장환 목사는 “성직자들은 개인의 왕국을 세우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한 시대 사명을 다하고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발행인과 나눈 현 한국교회의 여러 갈등과 문제점에 대한 대화 중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했다.
새로운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
“도가 지나치면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이 나와야하고, 장 칼뱅(칼빈) 같은 사람이 나와야하는데, 과연 지금 한국교회의 부정부패가 거기까지 도달했나, 물론 잘못된 건 많지만 중세기 교회 부패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참 선량하고 믿음을 지키려 애쓰는 교인들이 많아요. 그러나 교권에 대한 권력, 교파에 대한 시샘 등이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한 번 흔들어놓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1973년 그가 39세 때, 김장환 목사를 일순간 유명인으로 떠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전도 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는데 5일간 320만 명이 모였다.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으며 각 언론이 집중했다. “당시는 김장환 목사가 제일 잘 해낼 거라는 판단 하에 추천을 해주셨는데, 지금 젊은이들을 보세요. 어디 영어뿐입니까?”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미래는 젊은이들이다. “저는 차세대들에게 소망을 가져요. 하버드에서 강연을 하는데 우리나라 학생만 한 500명이 모이더라고요. 미국 유명한 신학교를 보면, 한국 학생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좋은 인재들이 많아요. 그들이 지식과 넓은 견문, 경험으로 한국 교회를 이끌면 나아질 거라 소망을 가져 봐요. 우리 기성세대에게 기대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는 돈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망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전 우리 한국 교회가 참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축복을 받아서 갑자기 성장하고 물질이 풍부해지니 어떤 때는 생각이 흐려지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지금 그런 과도기를 겪고 있지 않나 생각돼요.” 한국 사회제도의 문제도 일조를 한다고 덧붙였다. “시골 농촌교회 가보면 거기서 목회하는 분들은 정말 성자에요.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자녀들 학원비는 물론 학비를 못 대주죠. 그 성직자 부모들의 심정, 그러니 나도 도시로 가야겠다, 교회를 크게 지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 간판 구조가 악재로 작용한다고 판단합니다.”
정치가 아닌, 오직 복음을 위한 것
그는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섬긴다. 이유에 대해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환경미화원, 양로원 거주 노인, 군인, 전경 등 많은 이들을 대접했으며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대통령들과도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소외된 이웃을 만나는 데는 조용하지만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장환 목사 입장에서는 “복음 전파를 위함”이니 거리낄 것이 없다. 복음은 평등하며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보다 기도가 필요한 이들이다. 그들이 곧 국민의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나는 정치인들 중에는 국민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고 현재도 늘 도마 위에 오르는 이들도 있다. 김장환 목사도 알고 있다. 세상의 시선이 어떨지 예상했으며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복음은 필요하다. 1988년 12월 어느 날, 김장환 목사는 백담사를 찾았다. 목사가 절에는 어쩐 일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기도해주려고 왔습니다.” 경내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런 그를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장환 목사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목사님께서 저를 안 찍은 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당선되고 난 후에는 저를 도와주시니 진짜 민주주의 원리를 아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김장환 목사는 후회했다. 조금 더 격려하고 조금 더 많이 위로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에 땅을 쳤다.
김장환 목사는 당부한다. “쓰러지고 넘어져 낙망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당장 손을 내미십시오. 슬픔과 고통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지금 위로의 편지를 띄우십시오. 섬겨야 할 사람이 있다면 곧장 따뜻한 물을 데워 발을 씻겨드리십시오. 나누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 이웃의 초인종을 누르십시오. 섬김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다음에’는 늦습니다.”
part 2
‘한국인으로 살아 온 미국인
낯선 땅에 섬김의 꽃을 피운 트루디 사모
“이것은 청단이라고 하고, 그림이 이렇게 맞았을 때 점수를 따게 되는 거야.” 동네 아주머니들은 모이면 자주 화투를 쳤다. 그녀는 화투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맏동서에게 화투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화투가 ‘마을 사람들의 화합을 저해하려는 목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을 해치기는커녕, 모일 때마다 화투를 쳤으니 본래 취지를 벗어난 셈”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그리고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대학을 마치고 일주일 만에 결혼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 무작정 남편을 따라 작은 땅 한국에 왔다. 밤에 도착한 그녀는 어둠 속 불빛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와 닮아서 그처럼 좋은 집이 많겠거니 했다. 아침에 일어난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풍경과 맞닥뜨렸다. 수많은 오두막집이 즐비해있고 산은 황폐했다. 당시에는 국제결혼이 뉴스거리였기 때문에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를 따라 다방에 들어갔다. 기자가 문을 놓는 바람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미국에서처럼 당연히 문을 열고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다. 어쩐지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국과 미국의 예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200명 남짓한 사람들 무리에 놀랐다. “전부 다 빌리(Billy, 김장환 목사) 친척이에요?” “아니, 나도 모르는 사람이야. 오늘이 무슨 날인 건지도 몰라.” 알고 보니 30명 정도는 수원에서 온 친척들이고 나머지는 미국에서 온 여자가 낯선 구경꾼들이었다. 그렇게 트루디 여사는 한국과 만났다.
그녀는 하루에 3번씩 14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먹을 식사를 준비해야했고, 식사가 마치기 무섭게 설거지를 해야 했다. 세탁기는 없었다. 빨래터에 나가 얼음을 깨고 맨손으로 빨래를 했다. 화장실은 후미진 곳에 있는 재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잘 견디었다. 따뜻한 온돌 바닥이 신기하고 재미있다면서 데굴데굴 구르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김장환 목사는 말했다. “하나님은 제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 중 최고의 복은 아내 트루디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4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저를 비판하는 사람은 간혹 있었지만 제 아내를 뭐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한국에서 살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녀는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대답했다.
다정다감한 남편과 따뜻한 한국 식구들이 있었지만 타국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사회적 편견이 심하던 당시, 혼혈아인 두 아들들과 딸은 놀림의 대상이 됐다. 특히 큰아들 요셉은 셋 중 가장 이국적으로 생겨 더욱 곤욕스러웠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사람들이 쳐다보면 슬쩍 손을 놓고 싶은 적도 많았다. 어느 방송에서 그는 “어릴 때 뾰족한 코가 싫어 납작하게 만들려고 방바닥에 코를 대고 잔적도 있다”고 했다. 둘째 아들 요한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책 MOM을 통해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며 언제나 우리가 받는 상처를 달래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 중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말은 아이들의 놀림이 아니라 “엄마, 제발 학교 오지 마!”라는 아들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 아들들이 자라 모두 목사가 됐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둔 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아내로, 사모로, 선교사로, 어머니로, 교육자로 살아온 그녀의 지난 길에 향기 짙은 꽃이 피었다.
‘Bloom where you are planted’
한국의 며느리에서 한국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지금이야 하늘의 섭리를 깨달았지만 오래전, 그녀는 그저 아름답고 꿈 많은 소녀이자 딸이었다. 인구가 1천여 명이 되는 미시간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사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금도 “동양인처럼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듣는 트루디는 “작은 체형 덕분에 빌리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160cm 남짓한 키의 그녀는, 학교에서 ‘Sparkle(불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기 높은 여학생이었다.
학교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1학년 트루디는 웃으며 정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환은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이미 우등생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 여학생들에게 동정 받기 싫었다. 그런데 트루디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영어 선생님에게 조용히 물었다. “트루디가 나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줄까요?” 그날부터 트루디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선생님과의 합동작전이 시작됐다. 정환이 서툰 문장으로 편지를 쓰면 영어 선생님이 멋진 단어와 훌륭한 문장으로 편지를 재탄생시켰다. 트루디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빌리에 대한 호기심과 영어 선생님의 훌륭한 문장에 걸려들었다”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보내던 그들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정식 데이트를 시작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밥 존스에서 정한 대로 지정된 데이트룸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15센티 이상 떨어진 상태에서 함께 교정을 걷는 정도였다. 무슨 상관이랴. 정환은 행복했다.
놀랍게도 먼저 프러포즈를 한 것은 트루디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정환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는 것. 대신 서로의 고등학교 졸업 반지를 바꿔 끼었다. 여느 청춘남녀가 그렇듯 작은 오해와 짧은 헤어짐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들은 1958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곧 결혼했다. 트루디의 어머니는 가난한 동양인 청년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밥 존스 총장은 말했다. “그 사람이 미국인이든 동양인이든 트루디가 빌리 김보다 더 좋은 신랑을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혼의 달콤함은 고작 신혼여행 1주일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예정된 고생의 시작이었다. 신혼의 고생이야 가난한 땅 한국에 와 뿌리내리기까지를 생각하면 예고편에 불과했다. 처음 한국의 풍경에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나 “정이 많은 한국의 인심과 가족적인 문화에 안심했다. 한국의 풍습과 문화에 잘 모르는 부분은 차근차근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Bloom where you are planted(뿌리 내린 곳에서 꽃피우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한국의 며느리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는 지금,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 대담 = 최세진 발행인, 정리 = 이영경 기자 lyk@mhj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