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의 아내 트루디 사모

60년 동안 기독교 교육에 매진하며 복음 전파

김장환 목사 아내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김


미국에서 김장환 목사를 만나 결혼한 트루디 사모는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십시오’라는 좌우명을 안고 한국 땅을 밟았다”고 전했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60년 전, 서양인 사모는 왜 척박한 한국 땅에 시집왔을까. 갈색 머리칼과 160cm 남짓한 키,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처럼 생긴 외모와 아담한 체구는 어쩌면 그를 한국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이러한 그의 체형 덕분에 남편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의 눈에 띄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유쾌하면서도 겸손한 성품이 묻어났다.

미국의 밥존스 고등학교에서 김장환 목사를 처음 만난 트루디 김 사모(84)는 1958년 밥존스대학교 졸업 이후 1주일 만에 그와 결혼한 뒤, 한국행을 결심했다. 1959년 세계기독봉사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파송돼 경기도 수원시에 정착한 그는 60년 넘게 국내에서 사역하며, 교육학인 대학전공을 살려 영어를 가르치고 교회 부설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국교회의 큰 리더의 뒤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모들이 있었다. 이처럼 남편 김장환 목사가 목회와 선교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묵묵히 섬겨온 트루디 사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심겨진 곳에 꽃 피우길 바라며”

사모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묻는 질문에 그는 “목회자 사모로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로서의 부르심이라 말하고 싶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빌리 킴’이었고 그가 목사의 길을 가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동반자로서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선교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었기에 남편의 목회를 옆에서 응원해주고 섬기는 것이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주저함 없이 사모의 길을 가게 된 배경을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김장환 목사. 당시 영리하고 부지런한 그의 모습이 미군의 눈에 띄면서 미국에 건너와 대학원까지 졸업하게 됐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 트루디 사모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지만, 고국에 돌아가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결국 트루디 사모는 남편을 따라 1959년 12월 12일 밤 8시,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해 17일간의 긴 항해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뒤였다. 당시 그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했던 샌프란시스코 야경을 뒤로하고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판잣집이 가득했던 한국의 부산항을 마주해야 했다.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십시오’가 제 좌우명입니다. 이 말처럼 제가 심겨질 곳은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한국행 배를 탔습니다.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17일 동안 계속 척박한 한국 땅에서 아름다운 복음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부산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향한 그는 시댁이 있는 수원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에서 사역하며, 그러한 기도 응답이 열매 맺어 가는 과정을 목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24살의 나이로 수원여자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하루는 수원교도소 교도관이 찾아와 여성 재소자들을 위해 영어를 가르칠 것을 부탁했는데, 이후로 그는 9년간 교도소 문턱을 드나들며 재소자들에게 영어와 함께 복음을 전했다. 트루디 사모의 열정과 끈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도소 재소자에게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복음을 함께 전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늘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듯이 제 주변의 사람들을 열심히 섬기고자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장환 목사가 1965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섬김 사역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78년 중앙기독교유치원을 설립해 기독교 교육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1994년 수원중앙기독초등학교, 2007년 중앙기독중학교를 설립해 평생을 기독교 교육에 매진했다. 특히 트루디 사모는 초등학교 내에 파이숍(Trudy’s Pie Shop)을 세워 직접 빵을 굽고 판매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장애아 특수교육에 사용했다.

교회에서의 화장실 청소와 주방 일 등 궂은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로 인해 트루디 사모를 모르는 외부 사람들에게 종종 ‘외국인 파출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그는 “목사님이 가정일로 목회가 방해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또 굳이 교회 안에서만의 사역을 사모의 역할로 제한 두지 않고, 여러 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가르쳤고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다.

 

“감투보다는 ‘섬김’의 자리로”

부부는 살아가면서 서로 닮아간다고 했던가. 나눔의 정신은 트루디 사모와 남편 김장환 목사의 삶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김 목사는 1960년부터 수원중앙침례교회 협동목사로 일하며 1966년부터 담임목사로 부임했지만, 사례비는 1980년부터 받기 시작했다.

“남편은 극동방송 사장으로 일하면서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고, 오히려 집회에서 받은 사례비도 모두 극동방송을 위해 입금합니다. 선교 초기에 여러 가지 일을 해도 월급은 한 곳에서만 받는다는 원칙을 세운 뒤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트루디 사모 역시 중앙기독유치원 원장(1979~2017년)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월급을 쓴 기억이 없다. 자신의 월급 통장을 40년간 줄곧 직원에게 맡겨놓고, 유치원에서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게 한 것이다.

그는 “유치원이 늘 돈이 부족해 교회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데 내 몫만 덜렁 챙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돈을 쓰지 않으며, 긴급한 상황에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주님이 채워주신다는 걸 믿는다”며 자신의 재정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남편 김장환 목사에 대한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사역과 일보다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로서 최근 건강이 악화된 자신을 극진히 간호해주는 든든한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트루디 사모는 “남편은 부지런하고 열정이 넘친다. 특히 복음에 대한 열정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가부장적으로 보이지만 집에서는 애처가로 저녁마다 대야에 물을 떠서 발 마사지도 해주는 따뜻한 남편”이라고 밝혔다.

현재 몸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서는 “매일 퇴근 후 집에 와서 휠체어도 밀어주고 뒷정리를 돕는 등 정성껏 간호하며 돌봐준다. 토요일은 나를 돌보기 위해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으려 한다. 매일 저녁 함께 기도해주면서 위로하고 격려해주는데, 이 시간을 통해 큰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회복되길”

특별히 목회자 사모로서 사역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조언도 건넸다. 그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하고 수고하시는 사모님들께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사실 처음 교회에 방문한 분들은 제가 외국인 노동자 청소부냐고 착각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제 자리에서 묵묵하게 꽃을 피우는 것이 사명이라 생각할 때 상처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주님이 사모님들의 헌신을 알고 계시고,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오랜 어려움을 겪은 한국교회를 향해 “한국교회가 지금의 어두운 터널을 잘 통과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 모두 주님 앞에 나아와 그동안 교회들이 복음보다 혹시 더 중요시 여겼던 것은 없는지 뒤돌아보며, 회개할 때 제2의 부흥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국교회 부흥의 큰 전기를 마련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1973)’ 50주년을 맞아 극동방송은 2023년 6월 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50주년 기념집회를 연다. 이를 위한 기도도 당부했다.

“한국교회들이 주님 앞에서 다시 헌신하고 새롭게 일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해주십시오. 함께 힘을 모아 기도하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일어날 때 이 땅에 새로운 부흥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 정하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