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21-10-12]
14명 대식구와 선교 공간 마련하려
최소한 비용으로 집 짓기 시작하자
남편 설교하던 근처 교도소서 지원
봄이 되면서 남편은 우리 부부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초가집은 14명의 대식구가 살기엔 너무 좁았고 무엇보다 선교를 하기 위해선 조금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남편은 미국에서 올 때 친구들이 모아준 500달러로 땅을 보러 다녔다. 지금이야 500달러는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남편은 시댁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인계동에 땅 1200평을 샀다. 현장을 둘러보니 주변에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 지금은 수원의 중심이 된 인계동은 당시만 해도 땅 한평 값이 30원에 불과했다. 남편은 만약 나중에 미국에서 후원금이 오지 않으면 과수 농사를 지어 선교비를 충당할 계획으로 땅을 사둔 것이라 했다.
돈을 최대한 줄여서 집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했다. 설계도는 설계에 일가견이 있다는 선교사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 나는 밤마다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집 짓는데 사람이 너무 부족해요. 인부를 살 돈도 없으니 주님께서 적당한 사람을 보내주세요.”
나의 이런 기도 내용을 들은 시댁 식구들은 “무슨 수로 그 많은 인부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터무니없는 기도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교에 쓰일 집을 짓는 데 두 팔을 걷고 나서주셨다. 당시 남편은 시댁 옆에 있는 수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위문품을 전달하곤 했는데 우리가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은 교도소 소장이 모범수들에게 건축을 도울 것을 지시한 것이다. 모범수들이 마을의 모내기를 도와주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모범수들의 도움을 받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주님 감사합니다.’
모범수들이 몰려와 집 짓는 걸 도와주는 모습을 본 맏동서와 시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트루디 기도가 이뤄졌다”며 축하해 줬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지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오산의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댄 스튜어트 상사 덕분에 수세식 화장실을 마련했다. 남편의 지인인 스튜어트는 일본 출장길에 변기와 세면대, 펌프를 사와 우리에게 선물했다.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온 건 1966년이었다. 그전까지는 촛불을 켜거나 어두워지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우리가 돈을 들여 전봇대를 세우자 비로소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 일이 생기면 1시간 거리인 기독회관까지 가야 했다. 그러다 80년이 돼서야 집에 전화를 마련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비로소 수원에도 비포장도로가 생겼다. 집이 몇 채 안 되는 우리 동네엔 10년 동안 버스도 안 다녔다. 70년에 겨우 용인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생겨 하루에 한두 번 우리 동네를 지나갔다.
남편이 가끔 출장이라도 가면 나는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남편은 미국으로 출장 가면 세 달씩 체류할 때도 있었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내 숙제였다.
/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