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2020-09-16]

인터뷰 중이신 김장환 목사님 사진

▲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스퀘어에서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가 그가 관여했던 한·미 외교 비사(秘事)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 韓·美 외교의 산증인 김장환 목사

예배 때 좋든 싫든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왜냐면 우리가 평안하게 잘살기 위해서
트럼프 당선 ‘일등공신’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韓美정상회담 전 文대통령과 만남 주선
박정희 대통령 당시 미군 철수 안한 건 내 공이 아니라 외교관이 노력한 결과… 최종 결론 내린 건 카터
코로나로 답답해하는 국민 숨통 터줘야… 정부에서 사람들이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해야

개신교계의 원로인 김장환(86) 목사는 침례교세계연맹(BWA) 총회장을 지낸 세계적인 목회자이자 복음방송인 극동방송의 경영인이다. 6·25전쟁 당시 하우스보이였던 그가 미국 유학을 거쳐 개신교계의 거목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소개하기엔 지면이 협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그가 한·미 외교사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익을 위해 숱한 공헌을 해낸 숨은 조력자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힘든 모든 이들을 위한 종교지도자의 위로를 듣기 위해 신청한 인터뷰 자리였지만 대화는 현안과 외교 비사로까지 이어졌다.

지난달 31일 여의도 63스퀘어 한 중식당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수원의 집을 나선다는 그는 86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말투에서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에너자이저(Energizer)’가 분명했다. 그는 철저한 복음주의자(Evangelist)이면서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3E’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화는 코로나19 얘기부터 시작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한국의 교회들이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 특히 8·15 집회 참석자들이 모두 도매금으로 몰리는 것은 좀 아쉽다. 모인 의도가 무엇인지는 다 사라져버렸다.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게 꼭 해법이었는지,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았는지 아쉬움이 있다. 제주도로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 200명 가까이 타고 한 시간 같이 있는데 통제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주일 이상 50명 넘게 못 모인다. 교회를 유흥업소와 연결해 다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의 행정명령이 과하다는 말인가.

“물론 정부의 노력 이전에 각자가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일방적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과 국민을 믿는 것, 특히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정부가 너무 과도하게 행정명령으로 밀어붙이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왜정 때 신사참배 안 하고 감옥 간 경우도 있지 않았나. 정부가 여론을 좀 더 많이 듣고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는데 망치만 두드리면 국민이 따라와야 하는 것으로 아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우울증도 많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답답해하는 국민의 숨통을 좀 터줘야 한다고 본다. 정부에서 사람들이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좀 연구해 줬으면 한다. 요즘 우리 방송에서는 사람들이 위로를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방송진행자가) 말을 적게 하고 음악을 많이 내보내려고 한다. ‘새 발의 피’밖에 안 되겠지만 해외에서 들어와 2주간 격리되는 사람들을 위한 물품 2만 개도 기부했다. 어디 놀러 갈 곳도 없고 집 안에 갇힌 애들과 사람들을 위해 요일마다 개방하는 장소를 정한다든가 여러 가지 해소책을 좀 찾아줬으면 한다. 탁상공론으로는 안 된다.”

김 목사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극동방송은 최근 교회를 못 가는 사람이 늘면서 청취율이 높아졌다고 했다. 찬송가 한 곡이 나가더라도 힘이 될 수 있는지 방송사 직원들하고 협의한다고 했다.

김 목사는 한·미 동맹과 한·미 외교사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워싱턴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이전에 미국 빌리 그레이엄 목사(2018년 작고)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를 연결한 사람도 그였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 통역을 한 계기로 인연이 된 김 목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의 대통령들이 핫라인을 통해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하고 기도를 요청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대선 때 트럼프를 공개 지지하고 50개 주에서 집회를 갖고 투표를 독려했다. 박빙의 승리를 거둔 격전지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취임식에 초대돼 축복기도까지 한 인물이다. 그는 2017년 6월 청와대에서 김 목사와 함께 문 대통령을 만났다.

―문 대통령과 프랭클린 목사의 만남은 청와대에서 요청한 것인가.

“제가 목회한 교회의 장로인 김진표 의원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아들을 한국에 초청할 수 있는지 저에게 요청해 왔다. 김 의원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날 때 얼굴을 뒤로 돌린 채 악수하는 것을 보고, 문 대통령이 미국 가서 홀대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김 의원 부탁을 받고 프랭클린 목사를 초청했고, 그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왔다. 대통령과의 오후 예방 약속 시간이 예정보다 당겨지면서 그의 호텔에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호텔 매니저에게 부탁해 호텔 문을 따고 들어가 자는 그를 깨워 청와대에 들어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청와대에서의 만남은 어땠나.

“문 대통령이 ‘저는 미국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흥남철수 때 배(메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우리 아버지가 거제도까지 왔다. 그때 거제도 안 오셨으면 저는 태어나지 않았다. 미국에 들어가면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헌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야기가 모두 잘됐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도 부모님의 흥남철수 얘기를 했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친필 서한에서도 모친의 흥남철수 얘기를 언급했다.

―현 정부가 김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을 때 김 목사님이 보수여서 도와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을 것 같은데.

“저는 나라를 위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강연만 들었지 실제 못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는 역대 대통령 다 만났다. 목적은 하나다. 하나님을 신봉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러면 누구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개신교만큼 예배 때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종파가 없을 거다. 좋든 싫든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교회에서 누가 하라, 하지 마라 하는 것도 없이 순서에 들어가 있다. 왜냐면 우리가 평안하게 잘살기 위해서다.”

김 목사는 현 정부 들어 한·미 동맹에 대한 우려를 묻는 말에 “한·미 동맹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미국 여자(트루디 김 여사)와 살기 때문에 쫓겨난다”고 농담처럼 짧게 답했다. 70년 이어온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에둘러 강조한 말로 들렸다.

그는 대통령을 돕는 것에 좌우를 가리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외교가에서 ‘주한미군 감축론’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 1970년대 중반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때 한국에 대한 반한감정과 주한미군 철수주장이 한창일 때도 그의 역할은 상당했다. 그는 반한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수십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강연했다.

―카터 대통령이 방한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신경전이 치열했다고 들었다.

“카터가 침례교 집사였을 때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 대통령 출마한다고 했을 땐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카터가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박 대통령이 제공한 숙소를 거절하고 미 대사관저에서 잤다. 오자마자 2사단에서 조깅하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화가 많이 났다. 카터가 여의도에 있는 교회에 갈 때 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하기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갔다. 차 안에서 나는 박 대통령이 애국자라고 카터에게 얘기했다. 박 대통령을 전도해 보라고도 했다. 박 대통령께는 카터가 전도할 테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었다. 당시 1차 회담 때는 박 대통령과 카터가 싸웠지만, 2차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미군이 철수 안 한 것은 나의 공이 아니라 그동안 많은 외교관이 노력한 결과였으며, 최종적인 결론은 카터가 내린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게 고마워 카터 재단에 매년 돈을 조금씩 보낸다.”

그는 “외교는 국민이 다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해마다 어린이 합창단을 데리고 미국에 가 참전용사들 앞에서 공연을 해왔는데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김 목사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유학 마치고 돌아올 때 지금 보이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었고 다 초가집이었다. 저기 롯데타워 좀 봐라. 이게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정말 위대한 나라인데 정치를 조금 잘해 줬으면 좋겠다. 협치를 해야 한다. 그게 위정자들의 사명이라고 본다.”

방승배 기자 bs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