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8-04-29 12:14]
[한겨레가 만난 사람] 기독교 보수교단의 거두 김장환 목사
꼭 35년 전인 1973년 5월 말, 서울에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대회가 열렸다. 5일간 총 320만명이 운집했다. 마지막 날엔 117만 명이 모여 집회 사상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때 대회 장면은 , 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당시 그레이엄 목사 옆에서 유창하게 통역을 한 ‘키 작은 목사’가 바로 그였다.
“둘 다 긴장했지만 하나의 음성으로 나왔던 것 같아요. 그 ‘사건’이 통역설교의 핵심이 됐고, 지금도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이 그걸 모델로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있다고 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도 그때 내가 한국말로 설교하고 자기가 영어로 통역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 목사는 “당시 통역은 나를 세계적으로 부각시켜준 가장 큰 이벤트였다”고 회상했다. 애초 주최 쪽에서 조용기 목사한테도 통역을 제안했으나 김 목사로 최종 결정됐다고 한다. 그는 그 뒤 조 목사와는 ‘실과 바늘’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김장환 목사는 누구?
김장환 목사는 1973년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를 통역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크게 알렸다.
극동방송 김용호 전 심의실장은 그에 대해 “이밴절리스트(Evangelist)로서 철저한 복음주의자,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 그리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는 에너자이저(Energizer)”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후 김 목사 자신도 늘 3E 역할을 잘 해내리라 다짐한다고 했다.
김 목사는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미국 유학 가 만난 미국인 아내 트루디 김 사이에 낳은 두 아들, 요셉(47) 요한(41)씨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손자들에게도 수시로 목사가 되라고 독려한다. 김 목사는 “혼혈인 세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란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말한다.
1934년 수원 출생으로 밥 존스 고교, 밥 존스 대학 및 신학대학원(신학석사)을 졸업하고 미국 트리니티대, 사우스웨스트 침례대 등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았다. 2000~05 침례교세계연맹(BWA) 총재를 지냈으며, 현재 극동방송 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한국 10대선교회 YFC(Youth Fof Christ)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1993년 2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극동방송> 전파를 통해 북방정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섬기며 사는 기쁨> <제자가 되려면> <값진 유산> <생명을 걸고 사랑하라>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라> 등을 냈다.
성직자 첫번째 임무는 영혼구제
몇 차례 정치입문 제의 뿌리쳐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보수든 진보든 믿지 않는 이들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로 뭉치자는 것도 진보로 뭉치자는 것도 아니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직자들이 해야 할 첫째 일은 영혼구제라고 봐요. 사회참여냐 영혼구제냐 하는 것은 마차가 앞서야 하냐, 말이 먼저 앞장서야 하냐와 마찬가지 문제지요.”
그는 “지난 총선에서도 일부 보수교계 인사들이 정당을 만들면서 참여하라고 했지만 ‘40년 간 목회만 한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가려면 벌써 들어갔을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만남은 지금도 자주 하고 있다. 4·9 총선 무렵,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씨를 초청해 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거침없이 토로한 것이 기사화가 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미국 방문 직전인 지난 13일에는 조용기 목사 부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부부, 김 목사 부부가 청와대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이 대통령의 방미 성공을 비는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그는 당시 찍은 사진을 담은 액자 3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요즘 역대 대통령들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전두환 대통령께 병중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한테 꽃이라도 보내라고 했어요. 그 분들 골이 참 깊어요. 김영삼 대통령 하고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고…. 저희 극동방송에서 김영삼-전두환 두 분이 배드민턴 시합 한번 하시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도 하죠. 그분들이 화해를 하시면 우리 국민들이 편해지죠. 김영삼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무지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무마시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 대통령한테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도하러 가려는데 괜찮겠느냐’ 했더니 이 대통령이 ‘그러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김우식 전 비서실장한테 부탁해 놨어요.” 그는 “전도도 인간적으로 신뢰가 쌓여야 돼요. 믿음을 가져야 모든 상황 판단이 정확하게 된다고요. 개인관계도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지요.”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를 방문했더니, ‘목사님이 저를 안 찍은 줄 압니다. 하지만 내가 되고 난 후엔 나를 도와주시니 진짜 민주주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t하더군요.”
김 목사는 이처럼 역대 대통령 대부분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나름대로의 대통령 평을 줄줄이 풀어놨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교에 가까웠고, 재래식으로 조상을 섬기는 유교였지요. 그런데 저더러 그래요. 자기는 선생님이랑 목사님한테는 꼭 ‘님’자를 붙인다고요. 근혜씨와는 10·26 이후 한 번인가 보고 별 인연이 없는데, 근영씨가 얼마 전 우리 교회에 와서 결혼한다고 주례를 부탁합디다.”
전두환 대통령과 아주 가깝게 지낸 걸로 알고 있다며 얘기를 거들었다. “백담사 있을 때 수시로 찾아갔어요. 거기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별 달아준 사람, 장관 시켜준 사람, 공천 준 사람도 안 오는데 김 목사가 찾아줘 정말 고맙다고 하더군요. 노태우 대통령이 측근을 한 번도 안 보내고, 딸(노소영) 결혼식 때 연락도 안 한 걸 특히 섭섭해 합디다. 전 대통령은 지금도 날더러 동생하라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많았다고 했다. 그가 교회 장로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계실 때 조용기 목사하고 저를 힘들 때마다 불러서 기도하곤 했죠. 현철씨 문제가 터졌을 때 조 목사가 현철이를 구속하라고 했어요. 나는 그런 말 못해요. 현철이가 구속되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가서 기도해줬어요. 디제이 아들들 구속됐을 때도…. 엄마들이 고마워했지. 그분들은 여론 때문에 면회도 못 가고 있었으니까요.”
김대중 대통령 얘기는 김 목사가 2001년 여름 쿠바에서 만난 피델 카스트로 의장에 대해 말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나왔다. “미국이 쿠바를 참 많이 압박했잖아요. 독일 캐나다 이런 데서는 다 투자를 하는데, 미국만 그렇게 안 하고 있다며 쿠바에 의약품과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 같은 것 들어오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도와줬어요. 한국하고 수교도 하고 한국에 오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러고 싶다고 해요. 그후 나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도 보내고 그렇게 지냈지요. 귀국해 있는데, 김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카스트로가 무슨 얘기 했냐고 물어요. 그래서 수교하시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미국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그는 이 대통령에 대해서는 큰 호감을 표시했다. “저는 하나님이 대통령 시켰다고 봐요. 그 많은 문제들을 안고서 보통 후보들이라면 벌써 무너졌어요. BBK 사건도 완전히 개입도 안 됐다고 보는 건 아니잖아요. 아프가니스탄 사건도 터지고…. 흠 없는 사람은 없는데, 고비고비마다 이렇게 되는 걸 보면 신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저 양반이 나라를 이끌어가면 변화가 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시대 최고 덕목은 ‘진실’
정치인도 종교인도 숨김 없어야
인터뷰를 마칠 때쯤 물었다. “우리 시대 제일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실이지요. 신호등 지키는 것도 진실입니다. 새벽기도 갈 때마다 빨간 불 다섯 개 안 지키고 왔다, 이런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왜냐면 지키는 차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가는 것도 아니고 힐끔힐끔 서로 쳐다보면서….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고 가정이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이지요. 진실하면 문제가 금방 해결될 텐데, 숨기다 보니까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나오는 거죠.”
/ 글 이상기 선임기자 amigo@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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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만난 사람] 김장환 목사 인터뷰 전문
– 목사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아니죠. 내가 영광이라구요. 조선일보 중앙일보 이런 데는 다 해봤는데 한겨레는 옛날 우리 하고 방송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뜸했어요.
– 섭섭하셨겠어요.
= 정치인들은 그렇겠지만 우리는 뭐, 죄인을 다 사랑해야지. 동아일보 죄인, 조선일보 죄인, 한겨레 죄인 다 사랑해야지…그런 편견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게 가지고 있지만 다 하나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사람인데. 부자간에도 생각이 다른 게 많잖아요. 사상도 다른 점이 있을 거고, 경제관 , 종교관도 다 다른 거니까. 그걸 다 포용해야겠지요. 나랑 생각이 똑같은 건 없잖아요.
– 사실 똑같은 게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 그렇지. 지금 한국은 좀 많이 변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기 기자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기자가 “기자직은 나의 천직”이라고 하면서 “저는 저의 직업을 ‘콜링’(Calling)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그는 “그래야 일이 쉽지요. 나도 목사가 천직”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한겨레도 전성시대가 있었고, 국가나 개인이나 다 똑같다”고 했다.
– 73년도 이던가요?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때 그렇게 열정적으로 동시에 통역이 가능했는지, 아직도 당시 상황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 네 5월말부터 6월초까지 닷새동안 했는데 320만명이 참석했어요. 세계 최고 기록을 갖고 있지요. 정치인, 교수 등 통역을 여러 번 해봤는데 당시 전도대회는 종교적 용어로는 성령이 역사했다고 생각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했고.. 두 사람의 말이 조화돼서 나왔던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도 내가 한국말로 설교하고 자기가 영어로 통역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혼연일체 설교였죠.
당시 한번하고 끝낸 게 아니라 닷새 밤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연세대에서 강연도 하고… 여의도광장에서 했던 것은 둘 다 긴장이 됐지만은 하나의 음성으로 나왔던 것 같아. 그 사건이 통역설교의 핵심이었고 지금 미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당시 그 ‘사건’을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있죠.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초인간적인 영역이죠. 그때 한국이 참 어려웠을 때인데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부흥의 초석을 만들어주신 거라고 봐요.
– 지금도 가장 인상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시죠?
= 그럼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자기가 그때 종교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그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 나가는 분들도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그때 영향력이 대단했죠. 또 전세계로 방송이 나가고, 제 목회 일생에 있어서는 저를 세계적으로 부각시켜준 가장 큰 이벤트였죠.
(당시 통역은 본래 빌리 그레이엄 행사 주최쪽에서 조용기 목사한테 제안을 했으나 김 목사로 최종 결정됐다고 한다. 김 목사는 두살 아래인 조 목사와는 그후 줄 곧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 당시 박정희대통령 얘기 좀 해주시죠.
= 그는 불교에 가까웠고, 재래식으로 조상 섬기고 하는 그런 유교였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 양반이 저더러 그래요. 자기는 선생님이랑 목사님한테는 꼭 ‘님’자를 붙인다고요. 그 자신이 선생을 했고 또 목사에 대한 존경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목사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한미관계가 아주 안 좋았지요?
= 한국 정계에서 카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카터가 조지아주 지사일 때 거기서 부흥회를 했고 그 양반을 여러 번 만났어요. 구면인 셈이었죠. 그분이 대통령 출마할 때 내가 기도를 많이 해드렸어요.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주한미군) 철군문제가 계속 대두되는 거야.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 독재한다고 하면서 밀어주지 않았어요. 이래저래 별로 좋은 교감이 없었지. (1979년 여름) 한국에 오면서 자기가 생각한 건 미군철군이랑 인권문제를 타결하려고 맘먹고 온 거죠.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공한 영빈관에 묵지 않겠다고 해 박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무시를 당했어요. 우리 집 찾아온 손님 잘 해주려고 하는데 싫다고 한 거죠. 카터는 그냥 미군들과 지내겠다 했었죠.
그래서 1차 정상회담은 실패에요. 팽팽했죠. 그러고 나서 카터가 종교지도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외무부가 주선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교단 총회장들도 와서 1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는데 카터가 저보고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지나간 이야기지만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대사관 분위기를 잘 좀 해달라 그래요. 전날 청와대에서 주최하는 리셉션에 나는 초대가 안됐었는데, 나는 내가 아는 친구가 한국에 오는데 대통령 초청도 못받은 주제에 대사관에서 뭐 어쩌고 하는 게 어렵다, 그냥 조용히 있겠다고 했죠. 이미 명단이 다 나간 상태이고…
나한테 뭐를 부탁하면서 분위기 조절을 해달라고 하면서 나를 부르지 않은 게 좀 그랬죠. 어쨌든 마지막으로 초청이 되서 그 자리에도 참석하게 됐지.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조용기 목사 등이 있었어요.
청와대 리셉션에 400명 정도가 모였는데 다들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부부동반으로 온 거야. 청와대에 들어서니까 경호원들이 다 우리 집사람한테 인사를 하는 거야. 우리 집사람이 경호원들한테 일주일에 두 번씩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우리야 뭐 마지막으로 가야지 앞줄에 설 수가 없잖아. 들어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을 유심히 보더라고요. 아주 뚫어지게. 카터부인이 나를 나를 보자마자 부둥켜안았거든요. 도대체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데 미 대통령부인이 저렇게 포옹을 하냐, 이러고 시선이 다 집중됐죠.
(김 목사는 주한 미대사관에서 한국종교지도자들과 카터 일행의 모임으로 화제를 금세 돌렸다.)
= 카터 대통령 첫 마디가 “내 친구가 먼저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해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요. 내 인사말 뒤 고 한경직(영락교회) 목사님이 한 마디 하시고, 김추기경이 한마디씩 했어요.
김추기경께서 “(카터더러) 당신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지금 김영삼 김대중씨가 가택연금 돼있는 걸 아냐”고 하니 카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끝나고 카터가 여의도침례교회 예배에 같이 가자고 해요. 그래서 내가 대사 자리에 앉아 같이 갔지요. 나는 거기서 작심을 했어. 그리고는 카터대통령더러 “내가 지금 박대통령을 전도를 하려고 한다. 도와 달라. 우리 대통령 그렇게 악한 사람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전도대상으로 삼고 기도도 몇 번했다. 내가 하는 것보다 카터 당신이 박대통령을 전도하면 더 나을 것”이라고 했지. 여의도 도착해서 여기가 (빌리 그래엄 목사의) 그 전도대회 했던 곳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면서 자기 여동생이 한국을 그렇게 오고 싶어한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초청할 테니 오라고 하라고 했어요. 교회에 도착하니까 한기만 담임목사가 인사를 하더라고. 카터내외하고 딸만 다른 의전 없이 나랑 예배를 보러간 거지.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한테 긴급전화가 왔다고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차지철 실장 전화였어. 예배 마치고 바쁘지 않으면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해요. 예배가 예정보다 20분이나 일찍 끝났어요. 한기만 목사가 긴장을 했는지 설교가 일찍 끝났던 거지. 시간이 남아서 아래층 유치원에 내려갔지. 거기 유치원 의자에 카터 내외와 같이 앉아 등소평이 미국에 온 이야기, 중국에 전도사 보내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쭉 했어요. 의전수석이 들어와서 시간이 됐다고 해서 카터는 국회로 가고 나는 청와대로 갔지.
(김 목사는 30년 다 지난 일을 마치 엊그제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기억했다.)
차지철이 나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지. 대통령이 궁금해 하는 사안이, 대사관에서 있던 일은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차안에서는 (나와 카터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한 거야. 그래서 내가 그대로 이야기를 했어요. 카터가 한국 오기 직전 일본 후쿠다 수상(현재 일본 후쿠다 수상의 부친)을 만났는데, 자기더러 박정희 대통령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했다거나, 누이동생이 한국에 오고 싶어한다는 등등 말예요.
그날이 마침 주일인데 오후 4시에 2차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카터 밥맛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박대통령한테 그랬어요. “각하게서 초청한 손님인데 미운자식 떡 하나 더 주란다고 만약 전도를 하거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야. 그리고는 개인적으로 왜 어제저녁에 우리 집사람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셨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김 목사가 외국여자랑 결혼했다길래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박근혜를 일주일만 빌려주십시오. 미국에 데려가서 방송사와 신문사 돌면서 인터뷰를 시키겠다고. 그 당시 미국에서는 박정희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알고들 있었거든. 근데 박대통령이 그러는 거야. “나는 근혜가 없으면 하루도 못산다”고. 그래서 더 이상 그 얘긴 안 했어요.
곧 2차 정상회담이 시작했는데 아주 잘 됐어. 1차보다 얼마나 잘 됐는지 몰라요. 카터도 기분이 좋았고 그러고 (박정희 대통령과) 둘이 차를 타고 같이 공항을 갔지. 그때 카터가 전도를 한 거지. 서로 좋은 목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서로 나를 이야기한 거지. 그 다음 월요일에 박대통령이 기분이 좋아서 청와대 직원들에게 휴가를 줬어요. 차실장이 3일있다가 나를 부르더라고, 대통령이 고마운데 뭐 해줄게 없냐고. 그래서 예수 잘 믿으라고 그거 밖에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아세아방송 장비가 들어왔는데 통관이 안 됐다. 창고 보관료만 매일 나간다고 했지. 그래서 당시 통일원 장관이
통일원에 기증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기증을 하고 대신 20년 대여를 해줄 테니까 대공방송을 하라고. 통일원에서 아세아방송으로 바로 다시 기증하는 방식으로 말야. 바로 해결이 됐어요.
시해사건(10.26사건)이 나기 전에 우정의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돼 있었어요. 카터 친서도 가져오라고 했는데 그때 시해사건이 난 거지. 그래서 사절단 대표와 내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 영정에 기도 올렸어요. 시해사건 직후에 한번 박근혜씨를 찾아가서 기도를 한번 해준 적은 있는데 그 이후로는 서로 연락이 없어요, 지금까지.
박근영씨는 우리 교회를 나오죠. 얼마 전 와서 결혼한다고 주례를 부탁해 한번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1주일 뒤인 24일 두번째 만났을 때 기자가 “주례 하시기로 했느냐고 묻자, 그는 “JP가 `더 생각해 보시라’고 하시더라”고 했다. 김 목사는 그 이유는 말하지 않했으나 주례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카터 대통령은 그 이후로 미국에서 언론에 얻어맞았죠. 왜 불교대통령을 국정 다루는데서 그렇게 전도를 하고 그랬냐. 국가원수한테 왜 종교터치를 하고 왔느냐. 카터는 현직에 있을 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서 언론에서 많이 얻어맞았죠.
2001년 카터가 온양에 와서 집짓기를 했어요. 임창렬 경기도지사가. 카터가 날 좀 만나자고 그리로 내려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임창렬 지사와 같이 가서 김치 깍두기 이렇게 놓고 밥을 먹었어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카터가 자기가 박정희 대통령을 전도를 했는데 예수 믿고 지금 천당에 가있겠느냐고 나한테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거야 뭐 천당가봐야 알지 어떻게 아냐고. 카터가 거기에 지금도 관심이 있어요. 지금도 그 사람이 그걸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 침례교가 전도대회 이후 많이 알려졌지요?
= 맞아요. 그전까지 이단시 하고 그랬어요. 순복음, 장로교 외에 이단시하고 이런 것도 많이 없어졌어요. 미국에서는 침례교 하면 상하의원 중에 많아요. 빌 클린턴, 엘 고어도 신자입니다.
– 2001년부터 침례교세계연맹 회장을 맡고 계시지요? 아주 대단한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좀.
= 첫째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 통역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1973년 당시 그 전도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하려고 유치위원장으로 일도 하고… 둘째로는 그 전까지는 그 대회가 항상 적자였는데 서울에서는 흑자를 냈던 공이 컸고, 세 번째로는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언어가 소통이 돼야지. 그래서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게 크게 작용했지요. 이러면서 한국교세가 성장하는 틈에서 나를 이렇게 회장으로 해준 거지요.
–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수상과도 인연이 있으시지요.
= 호주 멜버른에서 2001년 1월 당선이 되고 그해 7월에 쿠바에 가서 취임을 했지요. 취임을 하고 첫 번째 만난 사람이 카스트로야. 예의상 한번 만나고 사진만 찍으려고 했는데 두 시간 이상을 같이 이야기를 했어.
미국이 쿠바를 참 많이 압박했잖아. 독일 캐나다 이런 데서는 다 투자를 하는데, 미국만 그렇게 안하고 있더라고. 내가 한국하고 국교도 하고 한국에 오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보니까 수도 아바나 시내에 현대 차가 막 돌아다니고 있더라고요. 카스트로가 한국에 그렇게 오고 싶어했어. 자기 나라에 그렇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니까.
내가 한국이랑 외교를 하자니까 그는 “하고 싶은데 북한이랑 미국 등 문제로 못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하면 미국 하고도 물꼬를 트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제안도 했어요. 당신은 어떻게 게릴라 혁명을 했느냐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수수밭에서 일을 했는데, 일을 하고 나면 다 미국 지주가 가져가 자기들은 굶는다는 거예요. 천주교에는 언제 들어갔느냐 했더니 당시 2페소를 내면 세례를 주고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자기도 세례를 받았었다고 해요. 그런데 천주교가 부패정부랑 손을 잡고 너무나 부패해 자기가 천주교도 떠나고 혁명을 했다고 하더라고. 미국이랑 완전 적대시된 거야. 내가 그때 두 가지 레솔루션을 성공했지요. 쿠바에 의약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어린이들이 먹는 우유 같은 것들은 들어오게 해달라. 그거 두개를 통과시켜줬다고. 장관들이 안 된다 안 된다 하다가 그 다음 주 쯤엔가에 통과를 시켜주더라고. 그래서 그 후로 나한테 크리스마스카드도 보내고 그렇게 지냈지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골프를 치고 있는데 김대중대통령이 전화를 하셨어요. 쿠바 다녀온 이야기 좀 해달라고. 청와대 들어가서 보고를 했지요. 이거 비하인드 스토리야.
내가 왜 쿠바와 국교정상화 안하느냐고 여쭸더니, 미국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무역협회라도 열라고 했더니, 근데 그것도 눈치 보더라고… 캐나다나 독일도 이북 하고 (외교) 하는데 하라고 말씀드렸어요.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서 하라고 말이야. 그런데 여지까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 박정희 대통령 말고도 역대 대통령과 특별한 사연이 많으시지요? 그 얘기 좀 듣고 싶은데요.
= 최규하 대통령 하고는 공식적으로 악수만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보안차장인가를 할 때 예배 인도할 때 만난 적이 있죠. 친분은 그 정도 있다가 우연히 미8군에 헌병소령 내외가 왔을 때 전재국(전두환 전대통령 장남)이 그 친구한테 영어 배우러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소령이 전도를 해서 세례를 받기로 했대요. 그래서 “한국목사한테 받을래 미국목사한테 받을래 했더니 한국목사한테 받겠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교회로 데려와서 내가 침례를 줬어요. 문홍구 함참본부장이 국방부 아주 높은 사람인데, 우리 교회 다녔어요. 문 장군이 12.12 직후 체포됐어요.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면회를 부탁했는데 안된다고 해요. 그래서 자택에 찾아가 부인한테 기도해주고 성경 읽어주고 그랬어요. 또 한번은 최순영 신동아 회장이 63빌딩을 지으려고 하는데 허가를 안 해주는 거야. 그래서 전두환 장군 내외를 우리 집에 초청을 했지. 최 회장 내외도 오라 하고. 정상천(당시 서울시장)부인을 내가 잘 알았거든요. 우리 집사람한테 영어를 배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최 회장이 투시도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날 보안사령부에서 우리 집 울타리 경호를 하고 했어요. 대통령 7년 하는 동안에 내가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안 만났습니다. 2.12 총선을 앞두고 1984년 말 이종찬 민정당 원내총무를 보내 수원서 국회의원 출마를 제의했는데, 안한다고 했어요.뒷날 전 대통령이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 세간에서는 두분이 아주 가깝게 지낸 걸로 알고 있는데요.
= 대통령 되기 전까지는 가깝게 지냈지요.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나같은 사람은 필요없어요. 대통령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고 백담사 가고 나서는 내가 수시로 갔지. 거기는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서울 보안사령부에 연락해서 만나도 되느냐, 해서 오케이가 되면 만날 수 있었어요.
자기가 별 달아준 사람, 장관 시켜준 사람도, 공천준 사람도 안 오는데 김 목사가 찾아줘 정말 고맙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도 자기 측근을 한 번도 안 보냈다면서… 딸 소영씨 결혼식 때 연락 안한 걸 특히 섭섭해 합디다.
그래서 노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이야기를 했지. 어쩌면 한번도 측근이 안 오냐고, (전)재국이 결혼할 때도 가서 인사도 시키고 했는데, 소영이 결혼 시킬 때는 연락도 없더라고 하더라. 장작도 보내고 쌀도 보내고 전기도 없는데 쫌 해라 했더니 다음날 노대통령이 바로 조치했다고 해요. 그게 고마워서 지금도 그 어른들이 나더러 진짜 성직자라고 하는 거야. 그때 아무도 못 갔거든요, 무서워서. 전 대통령은 지금도 날더러 동생하라고 하는데…
– 최근에도 만나시나요?
= 자주 뵙지요. 만나면 주로 신앙이야기를 하죠. 제가 있으면 식사 때도 술도 안하십니다. 저는 술 안하는 목사로 정평이 나있죠. 와인도 안 마시고 대신 콜라를 마셔요. 정치이야기는 미국과의 동맹, 이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기자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물었다. 4.9 총선 직후 김 목사는 YS와 JP를 식사자리에 초청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거침없이 토로한 바 있다)
–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스타일이신가요?
= 그 분은 청와대 계실 때 조용기 목사하고 저를 힘들 때마다 불러서 기도하고 했죠. 그런 이야기 못하는 데 조용기 목사님이 현철이를 구속하라고 했잖아요. 그 당시에 나는 성경 보고 조 목사는 기도 하시고 돌아가는 이야기들 다 하고.. 나는 현철이가 구속되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가서 기도해줬어요. 디제이 아들들 구속됐을 때도 그러고…엄마들이 고마워했지. 그 분들은 여론 때문에 면회를 못가니까 말예요.
요즘 내가 역대 대통령들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전두환 대통령한테도 병중에 있는 노태우 대통령한테 꽃이라도 하나 보내라고 했어요. 그게 참 골이 깊어요. 김영삼 대통령 하고 디제이도 골이 깊고. 극동방송에서 김영삼-전두환 두 분이 배드민턴 시합 한번 하시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도 하죠. 그분들이 화해를 하시면 우리 국민들이 편해지죠. 저는 정치목사라고 오해도 많이 받아요. 전두환 대통령도 나한테 정치하라고 했지만.. 나는 성직자라고 하면서 안받았어요. 지금 내가 화해를 붙여보려고 무척 노력을 해요. 김영삼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무지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무마시키려고 노력중이에요.
(24일 오전 다시 만났을 때 김 목사는 지난 13일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직전 조용기 목사 부부, 김 목사 부부 그리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부부가 청와대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찍은 사진을 담은 액자 3개를 기자 일행에게 보여줬다. 이들 개신교 목사 일행은 이 대통령 방미 성공을 위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마침 그 즈음 김 목사 부인 투르디 여사의 70회 생일이어서 이 대통령이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더라는 얘기도 함께 김 목사는 전했다.)
–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 이명박 대통령한테 그랬어요. “노 대통령한테 전도를 하러 (봉화마을에) 가려는데 괜찮겠느냐” 했더니 이 대통령이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김우실 비서실장한테 부탁해 놨어요. 전도도 인간적으로 신뢰가 쌓여야 돼요. 믿음을 가져야 모든 상황판단이 정확하게 온다고 봐요. 개인관계도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해요.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권영해 전 국방장관 하고최순영 신동아 회장 등, 이런 사람들 대 사면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화해가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이미 한 걸로 아시더라구요. 권 장관은 아직 서울구치소에 있어요.
(김 목사는 그동안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한 후보를 자신의 저서 <섬기며 사는 기쁨>(2002.10.21 발행)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그 직후 실시된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지 않았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노 대통령 재임시 미국의 목사님과 청와대를 방문했더니, 노 대통령이 ‘목사님이 저를 안 찍은 줄 압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민주주의를 진짜 아시는 분이십니다. 안 찍었지만 내가 되고 난 후엔 나를 도와주니 민주주의 원리를 아는 분이시죠’ 하시더군요”라고 했다.
화제가 미국과의 동맹 및 남북관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김 목사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보다 미국통인데다, 70년대 이후 40년 가까이 한미동맹 관계를 중시하며 이 일에 매달려왔다. 북한 역시 그에겐 중요한 선교대상 지역이다. 1977년 극동방송 사장 취임 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북한은 늘 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제 생각에 미국이라는 나라 하고 동맹이 두터워지면, 일본도 중국도 우리를 깔보지 않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북한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빨리 북한도 미국하고 정상화해야 합니다. 우리도 북미 정상화를 도와줘야 해요. 그러러면 북한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일을 해야 만하고, 하나를 주더라도 서로 주고 받고 해야죠.
– 북한방문 계획은 있으신지요?
= 내가 지금 북한에 가서 할 역할이 없어요. 앞으로 역할이 주어지면 하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물꼬를 터놓으면 북한 주민들이 다 내려와요. 그러니까 그 전에 그 쪽의 경제발전을 해야 합니다. 북한이 빨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 방송을 북한에서 숨어서 듣드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하여간에 잘 됐으면 좋겠어요. 북한 생활수위도 올라가고… 콩 공장, 국수공장도 많이 지어주고 말이죠.
– 이명박 대통령 얘기를 좀더 해주시죠.
=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대통령 시켰다고 봐요. 그 많은 문제들을 안고서,,, 보통 후보들 이라면 벌써 무너졌어요. BBK 사건도 완전히 개입도 안 됐다고 보는 건 아니잖아요. 아프가니스탄 사건도 터지고, 이런 거 여러 가지로 보면 말예요. 살면서 흠 없는 사람도 없는데, 그때 고비고비마다 이렇게 되는 거 보면 신의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저 양반이 나라를 이끌어가면 변화가 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가 최근 MBC가 방영한 ‘뉴스후’ 프로그램에서 일부 스님들이 비싼 외제차를 타고다니는 게 지적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나는 요즘도 내가 운전할 때는 프라이드를 탄다”며 “그런데 중앙청에 들어갈 때 보면 잘 안 들여보내더라고요. 그게 대한민국이야”라면서 말을 이어받았다.
= 스님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그래요. 차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차에 맞는 값어치가 있어야하는데, 지금도 내가 새벽기도 나갈 때 내가 직접 프라이드를 타고 가요. 주차하기도 편하고, 나는 조금도 불편한 게 없어.
내가 세계침례교총회장 됐다고 한 분이 에쿠스를 하나 사다 놨어요. 그래서 기름값을 주면 타겠다 했더니 한달에 50만원씩 줬어요. 그래서 그거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 타요. 그런데 청와대고 어디고 들어갈 때는 이런 까만차 안 타고 가면 들여보내지도 않고 이것저것 물어봐요. 차는 하나의 교통수단일 뿐이고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면 안 되는데 우리 나라는 안 그래. 1억5천만원짜리 탈 수 있는 사람은 타게 놔두고, 탈 수 있는데 안 타는 사람은 위인이고, 못탈 사람이 타고다니면 졸부인 거고 그런 겁니다.
– 한국 기독교가 이따금 지적을 받습니다. 세습이라든지, 너무 물신주의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저는 한국기독교가 나라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보는데, 교회가 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부작용도 있기도 하지만 교회 전체를 놓고 봐야지 단편만 보고서 교회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악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선한 일 하는 거 종교계가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80%는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늘진 곳에 손을 내미는 게 종교계지요. 물론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나쁜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일부만 보고 자꾸 언론에 나오고… 이거는 아니죠. 교회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도 그 교회를 외면할 수도 있어요, 불행한 일입니다. 절도, 성당도 마찬가지지요.
한번 티비에 나오는 걸 보고 모든 교회가 저렇구나.. 그건 지양해야 해요. 어떤 목사님들은 학교강당 빌려서 하고 헌금은 다 좋은 일에 쓰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공평하게 나가서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정치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죽기아니면 살기로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라서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우리 민족 다혈질예요. 급하게 모든 걸 다 하고, 그래도 좋은 점도 많이 있죠. 고속도로 만들고 이런 것 무지하게 빨리하죠. 호주에 관광 갔다가 펄펄 끓는 곰탕을 5분 만에 먹어치우는 민족이 우리 밖에 없어요. 빨리 먹고 또 빨리 보러 가야하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밥 먹는걸 엔조이하는데 우리는 안 그래요.
(화제가 지난 총선으로 갑자기 옮겨갔다. 그는 통합민주당으로 나와 수원에서 당선한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 얘길 꺼냈다.)
= 저 사람을 하나님 일을 시킬 수 있는 자리에 놔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분은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죠. 아이들이 안 오면 직접 집에 전화를 해요. 그러면 부모들이 부총리가 전화를 하니까 깜짝 놀래 교회에 보내죠.
그 양반이 그 캠프(노무현 내각)에 들어갈 사람이 아닌데… 디제이도 와이에스도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브라질 갔다가 갑자기 불려오더라고요. 나한테 교육부총리 하라는데 어쩌면 좋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눈치 보지말고 소신껏하라고 했죠. (김 교육부총리 재직중) 사학법통과 때문에 목사들이 삭발을 했잖아요. 그래서 목사들 중에는 그 사람 안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사학법에 문제제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래도 (사학들이) 대한민국에 돈이 없을 때 많이 기여를 했어요. 그건 인정해야 해요. 재단에서 학교를 시작됐으면 알아서 잘 하게 놔둬야 하는데 평준화가 돼 그게 문제지요.
(기자가 다시 종교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 설교나 말씀자료는 어디서 구해세요.
= 내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배운 거는 시사성 있는 잡지도 보고 , 서론에 그런 현실을 집어 넣고, 주석이나 책 같은 것도 많이 봐요. 그런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목사눈에는 설교 자료만 보이는 거야.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 요걸 설교에 써먹야겠구나, 그래요. 그게 바로 천직이야. 신문에 나오는 것도 오려서 놔두고 방송에서 나오는 거, 잡지 통계들도 오려놓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어. 다 벌써 누가 뭐 한 거예요. 거기에다가 누가 말했다고 크레딧을 달면 표절이 아니지요. 누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 우리도 이렇게 하자 그렇게 설교하는 식이지요.
장사하는 사람이나 설교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 뭘 보고 아 저거 돈 되겠다 하듯이 목사도 저거 설교꺼리 되겠다 하면 마찬가지예요.
– 목사님들도 이념적으로 갈리지요?
= 목사님들이 성직자로 그대로 있었으면 존경을 받았을 텐데 정치를 하시니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유혹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기독당도 나는 싸인을 안 했어요. 친구들이 다 싸인하는데 나만 안하니까 뭐라고 해요. 내가 40년 목회만 한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가려면 벌써 들어갔지요.
3선개헌이나 유신에 비판하지 않았다고 일부 목사들이 보수교단을 비판해요. 하지만 디제이나 노무현 정부 때 그들이 그 정권에 들어갔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존경을 했을 텐데…사회정화도 중요하지만 성직자들이 해야 할 첫째 일은 영혼구제라고 봐요. (사회참여냐 영혼구제냐 하는 것은) 마차가 앞서냐, 말이 앞서냐가 중요한데 뒤바뀐 거지요. 우선 성직에 대한 것을 충실히 하고 그 다음에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데, 사회참여가 성직보다 앞설 것 같으면 하지 말아야지요.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믿지 않는 이들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미국 가서 반한, 반정부 운동하는 거 보고 내가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교회도 갈라놓고. 급진운동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못견디니까 미국 가서 교파 갈라놓고 그런 일들을 하시더라고요. 저게 아닌데 했어요. 보수로 뭉치자는 것도 진보로 뭉치자는 것도 아니고 하나로 뭉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 종교 간의 갈등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요?
= 사실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상대 종교를 존경하고 인정하면 문제가 없지. 그 사람 믿는 거 내가 존경해줘야 하고, 그렇게 하면 갈등이 없어요.
가령 목사님들이 “해인사 통도사 없애게 해달라” 기도하고, 스님들이 “영락교회 새문안교회 없어지게 해달라” 기도하면 그게 되겠어요. (그는 그러면서 한국사회가 회교가 몰려와 갈등이 빚어질까봐 걱정이라며 자기의 종파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절대 용납돼선 안된다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 시대에 제일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지요?
= 진실이지요. 신호등 지키는 것도 진실입니다. 내가 새벽기도 갈 때마다 빨간 불 다섯 개 안 지키고 왔다, 이런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왜냐면 지키는 차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가는 것도 아니고 힐끔힐끔 서로 쳐다보면서…미국에서는 한 번도 안 지킨 적이 없어요. 한번 걸리면 벌금이 340달러거든요. 그런거 보면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우리 민족이 진실해야 한다 그런 생각입니다. 미국 아이들 교육시키는 거 보면 ‘고맙다고 해라, 거짓말하지 마라’ 늘상 그래요. 내가 봤을 때 누구 할 거 없이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이지요. 가정에서도 부부끼리 진실하면 문제가 금방 해결될 텐데, 숨기다 보니까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나오는 거죠.
– 목사님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무엇이신가요.
= 물론 기도지요. 자기 전에도 기도하고 눈 떠도 기도해요. 오늘(4월17일)은 제일 먼저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만나는 것을 놓고 기도했어요. 그리고는 성경읽기로 넘어갑니다.
– 이 다음에, 그러니까 후세들한테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 복음전도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사람, 전도의 일념으로 평생을 산 사람으로요. 내 묘비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빌립보서 1장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아무 빽도 없고 배경도 없는 사람을 여러 나라 대통령들 만나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하시고,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하시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양로원에 가면 내가 최고 인기인이야. 밑바닥에 있는 사람한테도 손을 내미는 게 복음전도자의 사명이지요.
김 목사는 그러면서 자신의 전도 전략을 넌지시 제시했다. “이제 총선에서 떨어진 사람들한테 가서 전도해야지요. 제일 먼저는 정동영 대표이지요. 이재오 의원은 교회집사인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들한테 위로를 좀 해줘야해. 지금이야 만나기 쉽지만 예전에 한창 날릴 때는 만나기가 참 힘들었지.”
(지난 4월17일 오전 첫 인터뷰 이후 사진 및 동영상 촬영을 위해 20분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더니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답이 왔다. 꼭 1주일 뒤인 24일 오전 9시30분 극동방송 3층 사장실 옆 회의실에서 인터뷰는 계속됐다. 김 목사는 애초 약속 시간보다 20여분 지난 뒤에도 1층 카페 샘으로 옮겨 다과를 곁들여 20여분 시간을 더 내줬다. 인터뷰는 오전 11시 극동방송 현관에서 사진 몇 커트를 더 촬영한 뒤 모두 마무리됐다. 두번째 만남에선 지난 번 궁금했던 일을 중심으로 물었다.)
– 우리사회에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든 배려든 잘 안되는 것 같아요.
= 소통이 안되는 이유는 첫째로 예를 들어 TV 가 우리 가정에 들어와서 모든 대화의 창구를 막아놨단 말예요. 손녀딸이랑 나랑 대화가 안돼. 또 나는 뉴스를 봤으면 좋겠는데 손녀딸은 뭐 딴 걸 보고 싶어해요. 내가 보기에는 미국대통령들은 블랙박스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어떻게든 연락이 되는데, 엄마랑 딸은 지금 소통이 안돼. 아들과 아버지도. 사장과 직원들도 소통이 안돼요. 핸드폰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까? 없을 때가 있었고 우리집에는 전화도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도 살았는데 이제 핸드폰이 없으면 못살 것같아요.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주위 환경이 아니라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50대 된 여자들이 인생에 가장 필요한 다섯가지가 있대요. 친구, 자식, 골프, 옷, 돈…그런데 남자들은 아내, 애엄마, 부인, 뭐 다 같은 거 아녜요.
나이가 먹으면 남자는 여자를 절대 필요로 하지만 여자들은 안 그렇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대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해야하는데 이게 자꾸 멀어지고 되레 멀리 있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고 그래요. 예전에 우리 집사람이 미국의 친정엄마한테 편지를 보내면 석달이 걸렸어. 지금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무지하게 빨라졌는데도 잘 안되고 있어요. 정부와 국민, 사장과 직원들,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는 거지요.
자기가 노력하는 것만큼 이루어지는 거지요. 아이들이랑 같이 있는 시간에도 부모들이 소통이 안돼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아도 정말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시간은 없는 거지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세계 여러 곳에 전도를 다녀도 집에서는 딱 30분이라도 아이들과 부인을 위해 전적으로 시간을 쓴대요.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거지요. 하루종일 같이 있는 것보다 30분이라도 제대로 이야기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 지난 주 역대 대통령들의 화해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구체적인 방법 좀 들려주십시요.
= 노태우 대통령과 가까운 측근을 만나서 전 대통령이랑 노 대통령 화해를 좀 해야되지 않겠냐 왜 안하냐고 했더니 아직 전두환씨한테 못 가봤다고 하더라고요. 노태우씨 눈치를 보느라고 말예요. 사실 그러한 면들에서 그 두 어른들이 화해가 된다면 국민들이 복을 받는다고 종교인으로서 저는 믿고 있어요. 그게 화해가 안되니까 그 밑에서 있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오해를 받는 거지요. 그런 게 빨리 해소가 되야지. 역대 대통령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종교도 마찬가지이죠. 개신교 교단별로도 그렇게 서로 종교간에 서로 존경하고 대화하는게 필요한데, 침례교 세계총회장으로 몽고에 갔을 때 대통령 예방을 하는데. 내가 불교 최고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났죠. 대통령이 두 종교지도자가 만났으니까 싸우지 말고 잘 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잘 도와주려 왔습니다 했어요. 캄보디아에서도 최고 불교지도자를 만나기로 하고 선물로 인사동에서 옥으로 만든 불상을 하나 샀었거든요. 그 사람이 앙코르와트에서 행사가 있어서 못 만났지만…예를 들어 불교지도자가 나를 만나러 온다 하면 십자가나 예수님 초상화를 가지고 오면 거부반응을 안 느끼지요. 근데 그사람이 불상을 가져오면 내가 아무래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불상이랑 캄보디아 말로 된 성경을 전해주라고 했어요. 첫째로 선물 줘서 싫어하는 사람 없고, 그리고 신뢰가 회복되야 하고 말이죠. 노력을 하는 그런 게 화해의 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에도 화목해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어요. 노조하고 사측하고 화목하게 한다거나 이혼하려는 부부를 화목하게 한다거나, 이런 게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 선거구에서 이긴 당선자에게 진 사람(한나라당 박찬숙 의원) 꽃이라도 보내고 찾아가서 인사라도 하라고 했어요. 근데 꽃보내면 약이 오른다고 직접 가서 인사한다고 하더라고요. 선거기간에 서로 상처를 많이 입었을 거 아녜요? 직접 찾아가는 것처럼 말로만 화해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긴 사람 진 사람이 서로 꽃도 보내고 찾아가고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는 참 인색해요.
– 봉하마을 방문 일정은 잡으셨어요?
= 김우식 실장이 오면… (잡아야죠) 지난 주 청와대에 들어가서 이대통령한테 노대통령한테 가서 전도 좀 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화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좀 싫어도, 정치적 적대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런 걸 오래가지고 있지 말고 해소해야지요.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걸 배제하면 안되지요. 어제의 적이 동지도 되고 말입니다. 사람이 그런 면에서 못할 게 없는데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우더라도 서로 화해하고 나면 더 친해질 수 있고 신뢰가 회복될 수 있는데 우리는 체면, 프라이드 같은 걸 너무 따져요. 일본에 사과하라는 거, 나는 별로입니다. 사과 안 한다는 사람한테 사과하라고 자꾸 할 거 없이 일을 같이 하면서 이렇게 하자 하면 같이 잘 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화해할 게 많지요.
= 그들 뿐만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이랑 전 대통령, 이렇게 얽힌 사이라는 거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이 얽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많이 노력을 해야죠. 전직 대통령이 건강도 좋고 하면 특사로도 갈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장관이나 총리가 가는 거보다 전직 대통령이 가는 것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거든요. 그걸 우리나라에서는 못하고 있잖아요. 김영삼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지요.
이 대통령도 YS 감정이 격화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보고를 다 받고. 그래서 제가 미국 다녀와서 빨리 뵈라고 했어요. 만나서 이야기 하고 그러면 풀어질 겁니다.
사실 도움도 많이 받았고 찾아갈 거라고 했어요. 나는 종교적 측면에서 만나는 거지 벼슬이고 뭐고 이런 걸 생각하고 대통령들 만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화해가 되고 하면 첫째로 우리 민족이 복을 받을 거고 두 번째로는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존경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주변에 강성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은 그런 게 필요없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 목사는 13일 청와대에서 이대통령 내외와 조용기 목사 부부, 김삼환 목사 부부와 자신의 부부의 저녁 회동을 다시 들려주면서 “영부인이 기도의 여인으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날 즈음엔 한겨레신문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한겨레신문 칼라도 때릴 때는 때려도 잘할 때는 칭찬도 하고 이렇게 가길 바랍니다. 한겨레 특징은 늘 살려야 합니다. 정권 바뀌었어도 정도를 걸으면 더 발전할 수 있어요. 직원들 교육이 무척 중요하지요. 우리 극동방송은 너무 보수로 가는데, 포교가 목표지 왜 정치에 간섭하느냐, CBS가 예전에 너무 그래서 교인들이 별로 안 좋아했어요. 우리도 한겨레랑 같이 뭘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요. 그럼 골수 보수들은 나한테 뭐라 하겠지만 말이죠. 사실 정부나 대통령이 언론하고 싸워가지고 득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교회에서도 평신도나 집사, 장로랑 목사랑 싸워서 절대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
– 정동영 후보나 낙선한 사람들 만나고 계신가요?
= 엊그제 손학규 대표 만났어요. 다 전도 대상자니까 만나는거지.
김 목사는 인터뷰 말미 지난해 5월 말 전립선 암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집사람은 2005년 골수암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1958년 8월8일 저녁 8시 결혼해 반세기를 부부로, 신앙의 동반자로 살아오는 부인 트루디 여사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뷰 도중 곳곳에서 적절히 끼워넣었다. 미국 부인에 대한 그 나름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법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