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김장환 목사님과 미군 칼 파워스 상사

▲ 6·25 전쟁 당시 미군 하우스보이였던 김장환(오른쪽) 목사가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준 은인인 칼 파워스 상사와 미군 부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장환 목사 제공

[문화일보 2020-09-16]

김장환 목사는

“너, 죽으려면 가거라.”

미국 유학길에 오르겠다는 17세의 김장환 목사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국에 가고 싶었던 아들은 ‘가거라’는 말만 귀에 담았다. 그렇게 떠난 고국 땅을 미국 유학생활 8년 동안 한 번도 밟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면 정치인이나 농림부 장관이 돼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제해주고 나도 배를 곯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당시엔 목사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34년 경기 화성의 농가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 목사는 늘 배가 고팠다. 열한 살 되던 해에 광복을 맞았지만 여전히 봄철이면 푸른 보리밥에 고추장을 곁들여 먹었다. 중학교 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학비 댈 돈도 없었다. 등록금 면제에다 용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철도고등학교 진학을 꿈꿨다. 입학 시험을 치러 수원에서 서울로 떠난 날은 1950년 6월 26일. 6·25전쟁이 터진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진학의 꿈은 무너지고 전쟁 통에 미군 막사에 친구들과 몰려가 구경을 했었다.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막사 청소를 해줬더니 미군들은 “원더풀”을 외쳤다. 그 길로 ‘하우스보이’가 됐다. 영어 이름 ‘빌리’는 당시 미군들이 제비뽑기로 지어줬다. 그는 “당시 하우스보이 월급은 담배, 초콜릿 같은 미군 보급품 남은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장관들 월급보다 적다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 목사는 “그 당시 ‘칼 파워스’라는 미군 상사가 있었는데 그는 전쟁 통에 부모와 생이별한 아이들을 보며 마음 아파했고 그 아이들 중 단 한 명만이라도 전쟁에서 구해내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며 “기회가 있으면 남을 돕겠다는 나의 철학은 거저 생긴 게 아니라 그런 모습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행 자체도 행운이었지만 그는 미국에서 더 큰 기적을 일궈 냈다. 유학 초기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빌리’로 불리며 고향 생각에 눈물로 지새우던 시절을 뒤로하고 교내 웅변대회, 주 웅변대회, 전국 웅변대회에서 차례로 일등을 거머쥔 것이다. 상품으로 받은 TV는 1950년대 당시 미국에서도 귀했다. 김 목사는 유학하는 데 도움을 준 파워스 씨 가족에게 선물했고 마을 사람들은 TV 구경을 하러 파워스 씨 집으로 몰려들었다. 여러 지역지에 이런 스토리가 소개되며 그는 꽤 유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고국으로 돌아와 목회자의 삶을 산다.

그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된 계기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한국 전도 대회 통역을 맡으면서다.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전도대회 마지막 날에는 117만 명이 집결했다. 간이 화장실만 5000여 개가 설치됐다. 가는 곳마다 구름 인파를 몰고 다니는 전설적인 목사 그레이엄의 복음은 김 목사의 입을 통해 광장에 울려 퍼졌다. 1970년대 한국 교회는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를 계기로 400% 성장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