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8-02-23 00:01]


국내 주요 목회자들이 회고하는 그레이엄 목사


21일 소천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인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세계지도력개발원장 박조준 목사 등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세 목회자가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처음 열렸던 자신의 전도집회 때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세 목회자는 이구동성으로 그레이엄 목사에 대해 “예수님의 겸손한 성품을 제대로 지니고 실천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조 목사는 22일 그레이엄 목사에 대해 “73년 그분이 말씀을 전한 뒤로 한국교회도 크게 부흥할 수 있다는 큰 꿈을 갖게 됐다”고 회상하면서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73년 그레이엄 목사를 한국에 초청한 주역이었고, 그레이엄 목사는 전도집회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직접 설교했다.

조 목사는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을 목사님을 생각하니, 남은 우리가 복음 전파의 사역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고 권면했다.

김 목사는 맨 먼저 “5∼6년 전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이 ‘아버지가 소천하면 장례식 때 조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73년 여의도광장 전도집회 때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으며 44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적인 우정을 나눠왔다.

그는 “그레이엄 목사가 생전 한국에서 열렸던 전도집회를 수시로 얘기했다”며 “그때 여의도에서 무릎 꿇고 말씀을 듣던 한국인들의 믿음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내준 캐딜락 자동차를 보고 그레이엄 목사는 “전도하러 온 나라에서 이렇게 큰 차를 타고 다닐 수 없다. 작은 차를 줄 수 없느냐”고 거절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가 겸손하게 세심한 부분까지 소통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왜 그가 세계적인 설교자가 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2010년 10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의 시골교회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레이엄 목사가 애창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르는 동안 여의도 전도집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더라”고 소개했다.

또 “1년에 서너 차례 미국을 방문할 때면 꼭 그레이엄 목사를 찾아가 만났다”면서 “3년 전쯤 시력과 청력이 좋지 않아 누가 방문해도 잘 알아보지 못하셨는데 딸이 ‘좋아하시는 김장환 목사가 왔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니 ‘거짓말 하지 마’라고 하셨다. 제가 손을 꼭 잡고 ‘저 왔어요’라고 했더니 그제야 ‘우리 전도대화 한 번 더 하자’고 답하시더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가 그 약속을 못 지키고 떠나셨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박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를 ‘설교의 롤모델’과도 같았다고 회상했다. 73년 여의도광장 전도집회 당시 행사준비 단계에서부터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한 사이다. 김 목사가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자,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부총재인 클리프 베로 목사의 통역을 맡아 헌신했기 때문이다. 박 목사는 “곁에서 본 그레이엄 목사는 매사에 냉철한 분이었다”면서 “허튼 말씀을 일절 하지 않았고 복음에 대한 통찰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했다.

박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의 성품은 설교에도 잘 녹아 있었다”며 “매우 역동적인 설교였고 지루하지 않았다. 항상 짧은 문장을 사용해 복음의 진수만을 전했던 위대한 설교자였다”고 했다. 박 목사는 ‘월간목회’ 2017년 2월호에 ‘내 설교의 롤모델’이라는 글을 게재했을 정도로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에 감화됐다고 한다.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법이 없이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셨다”고도 했다.

/ 노희경 장창일 기자 hkroh@kmib.co.kr